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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약사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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達城徐氏 門中 略史

 

로부터 多伐(다벌), 達伐(달벌), 達弗城(달불성), 達句伐(달구벌), 達句火(달구화), 大丘(대구), 대구(大邱) 등으로 이어지는 지명(地名) 역사와 함께, 현재까지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달성(達城, 現 달성공원)을 지키고 세거하면서 지역민과 더불어 호족의 장(長)으로 선대(先代) 일족(一族)이 유구한 문사(門史)를 이루어 왔습니다. 따라서 달성에서 터를 잡아 씨족이 세거(世居)하였던 우리 달성서씨(達城徐氏)는 대구의 역사를 대표하면서 지금도 대구 중심부에 현존하는 달성(達城)을 관향(貫鄕)으로 하고 있습니다.


조(始祖) 휘(諱) 진(晉)께서는 고려조(高麗朝)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오르셔서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지셨고 2世 휘 기준(奇俊), 3世 휘 영(穎)에 이르기까지 봉군(封君)을 받으셨습니다. 시조 묘역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문양리의 봉계산(대구지하철 2호선 종점에 인접) 묘역에 4세 선조까지 함께 묘단으로 조성(당시 고려조 수도는 개경으로 조정 관직에 계셨던 선조님의 묘역은 이북에 위치)되어 있으며, 서쪽의 인접 위치에 세운 영모재(永慕齋)를 통해 매년 한식일이면 전국의 종원들이 모여 시조부터 4세 선조에 대한 묘제를 차례대로 올리고 있습니다.

한식일 오후에는 5세 구계공(龜溪公) 휘 침(沉) 선조에 대한 묘제를 올립니다.


4世 휘 균형(鈞衡)께서는 고려 공민왕 때에 문과(文科)에 올라 요승(妖僧) 신돈(辛旽)의 탄핵을 주도하는 등으로 임금과 나라에 충절(忠節)을 다하였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양광도관찰사(楊廣道觀察使), 순충논도 좌명공신(純忠論道  佐命功臣)으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벼슬과 세자사부(世子師傅)를 지내셨습니다. 부(父) 휘 영(穎, 3世)에 대한 기록은 목은 이색선생의 문집 등에도 드러나 있습니다.


5世 구계(龜溪) 휘 침(沉)에 이르러 조선조 세종(世宗) 임금의 명에 따라 일족(一族) 대대로 세거(世居)하였던 달성(達城)을 국방요충지(國防要衝地)로 나라에 헌납하면서, 우리 일족(一族)은 대대로 세거하던 달성을 떠나 인근 대구(大丘) 남산고역(南山古驛) 의 일대지역으로 이거(移居)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세종임금의 은택(恩澤)을 구계공께서는 끝내 사양하는 대신, 당시 지역의 모든 백성에 대한 환곡세(還穀稅) 감면을 청하는 상소(上訴)를 올리셨고, 임금이 이를 기쁘게 윤허(允許)하여 당시로부터 대구부민(大丘府民) 모두는 이조 500여 년에 이르는 동안 나라로부터 5승(五升, 5되)씩의 세곡(稅穀)이 감해지는 혜택를 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평소 공께서 추구하시던 위민포덕(爲民布德)과 박시제중(博施濟衆)의 덕행(德行)을 몸소 실천한 것으로, 1665년(顯宗 6年) 대구지역 백성과 유림(儒林)에서는 지금도 현존하는 연구산(連龜山) 중턱(現 대구제일중학교)의 거북바위(龜巖)에 숭현사(崇賢祠)를 지어 공의 은덕(恩德)을 기리는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였던 것입니다.

공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의 팔공산 자락에 위치하며, 매년 한식일 오후에 전국 각지의 모든 종원들이 다시 모여 중심재(中心齋)를 통해 묘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암서원(龜巖書院)은 숭현사를 재사(齋舍)로 하여 1675년(肅宗 1年)에 창건된 후, 1718년(肅宗 44年) 대구 동산동으로 이건(移建)되면서 사가정(四佳亭) 휘 거정(居正)께서 추향(追享)되셨습니다. 숭현사는 1975년 지방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고, 1995년 대구 도심의 공동화 현상이 점점 심화되면서 구암서원과 숭현사는 대구광역시 산격동(연암공원로)에 소재하는 연암산의 탁월한 풍광(風光)을 갖춘 명당(明堂)에 다시 이건되어 오늘날 대구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현사에는 구계(龜溪) 서침(徐沉)선생을 주향(主享)으로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함재(涵齋) 서해(徐嶰),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약봉(藥峯) 서성(徐渻) 등 오현(五賢)의 선조를 배향(配享)하고 있으며, 지금도 매년 음력 9월 1일이면 지역 유림(儒林)의 주관으로 우리 종원들까지 구암서원에 함께 모여 선현(先賢)에 대한 은덕을 기리는 향사(享祀)를 빠짐없이 올리고 있습니다.


리 달성서씨의 자랑스런 기록을 새긴 유허비(遺墟碑)는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공원(達城公園)에 700년 달성서씨 문사(門史)를 상징하는 서침나무와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5世 구계(龜溪) 휘 침(沉)께서는 포은(圃隱)선생의 문인(門人)으로 조선 개국 이후 전의소감(典醫少監)과 삼남균전제처사(三南均田制處使)를 지내셨으며, 공의 삼형제 중 장남 휘 문한(文翰)께서는 승사랑(承仕郞)으로 광흥창 부승(廣興倉 副丞)을 거쳐 현감(縣監)을 지내셨고, 차남 휘 문간(文幹)께서도 중시(重試)에 올라 현감을 역임하셨으며, 3남 휘 문덕(文德)은 이조정랑(吏曹正郞)과 만경현감(萬頃縣監)을 지내셨습니다.

대사간(大司諫)을 지내신 3世 휘 충(衷)의 증손(曾孫) 휘 한정(翰廷)은 세종 때 문과 급제로 태학(太學)에 계셨으나,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모두 버리고 집안 일족들과 함께 소백산 기슭에 은거(隱居)하셨습니다.

 

안현감(淸安縣監)을 지내신 12世 낙재(樂齋) 휘 사원(思遠)께서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등과 함께 영남삼현(嶺南三賢)에 속하는 대유학자이시며, 임진왜란 때 천지가 왜적에 유린당하는 풍전등화(風前燈火)의 급박한 위기에서 대구(大丘)의 의병대장으로 혼신을 다해 활동하셨습니다.

의병모집과 병장기 조달은 물론 백성 구휼까지 감당한 공적은 역사적 본보기와 세상의 귀감으로 널리 전하고 있습니다. 각 지역에 대한 의병 조직(의병장, 유사)을 결성하고 초집향병문(招集鄕兵文)을 곳곳에 띄워 대구지역 최초로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에 대항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청안(당시 청주, 괴산의 연결된 지역) 현감으로 계시면서 국난이 겹쳐 막막한 고통에 진 백성 구휼과 군량미, 병장기 조달에 전국 곳곳의 전장(戰場)을 누비며 천명을 바친 활동은 공의 일기(日記)로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또 공의 아드님 휘 항(恒)께서도 부친의 뜻에 따르며 곳곳의 전장을 종횡무진하며 힘들고 궂은 일을 도맡아 충효를 바친 문중 역사도 매우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공께서 직접 필사(筆寫)로 남기신 기록(계명대학교 도서관 소장)이 어렵게 입수되어 일족(一族) 서수생 박사 등 경북대학교 교수진과 전문집필진에 의해 낙재일기(樂齋日記)와 낙재문집(樂齋文集)으로 국역됨으로서, 민족의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고증(考證)하는데 실존(實存) 사료(史料)로도 매우 소중히 활용되고 있습니다.


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에 우리 일족의 활약은 곳곳에서 더욱 크게 드러나 있는데, 10世 창계(昌溪) 휘 응시(應時)께서는 의병장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참모가 되어 마지막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시고, 충렬공(忠烈公) 시호와 이조판서를 추증받아 금산의 칠백의총(七百義塚)에 모셔져 있습니다. 충렬공의 뒤를 이어 아드님 동암(東巖) 휘 치손(致遜)의 혁혁한 의병활동도 함께 전하고 있습니다.

11世 망조당(望潮堂) 휘 인충(仁忠)과 재종제 휘 몽호(夢虎)는 임란 선무원종일등공신으로서 울산지역 의병대장이 되어 수많은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는 등 임란 전사(戰史)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특별 전과(戰果)를 남기셨고 휘 인충은 부산진 첨사, 휘 몽호는 훈련원 주부를 제수받으셨습니다. 망조당께서는 병자호란 때 김상헌과 함께 화의반대를 주도하신 훌륭한 충절까지도 기록으로 전합니다.

휘 수천(壽千)께서는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幕下)에서 선봉수문장(先鋒守門將)을 맡아 노량해전 등에서 전란의 물자조달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만든 대나무 뗏목으로 큰 전과를 올리며 끝내 순절하신 활약도 임란 전사(戰史)에 널리 전하고 잇습니다.

또한 망우당 곽재우장군과 함께 창의하여 아금암과 화왕산전투에 의병장으로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신 죽계(竹溪) 휘 재겸(再謙)과 순절하신 휘 득겸(得謙)이 계셨으며, 경주에서 의병을 창의하신 직제(直齋) 휘 방경(方慶)은 전란의 공으로 경주판관을 제수받으셨고, 만와(晩窩) 휘 경지(景沚)는 영천에서 창의하여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셨고, 경재(耕齋) 휘 승후(承後)께서는 망우당과 함께 의병을 창의하여 크게 활약하셨습니다.

 

재공(樂齋公)의 종제(從弟)로서 공의 막하에서 창의하신 이재(怡齋) 휘 사진(思進)은 북산의병장(有司), 낙산(樂山) 휘 思述(사술)은 초동의병장, 휘 행원(行遠)은 이동의병장, 휘 기원(期遠)은 복병장으로 활동하시는 등 우리 선조들께서 국난의 위기에 지체없이 앞장서서 일신(一身)을 바친 충절과 덕행은 온 천하의 충분한 귀감(歸勘)이 되고도 남음이 있으며, 그러한 귀감이 유독 우리 문사(門史)에 넘치는 것은 우리 후손 모두에게 큰 자부심이자 뿌리 정신의 효시가 되기에도 손색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한 낙제공의 종제이신 동고(東皐) 휘 사선(思選)께서는 대구와 경산지역을 대표하시는 큰 유학자로써 그 덕행과 인품이 남기신 유고나 문집으로 널리 전하며, 매년 움력 7월 20일이면 경북 경산(중방동)의 옥천서당에서 지역 유림과 문중 제현들이 모여 불천위(不遷位)를 통해 공의 높은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조선조 부사과(副司果) 벼슬을 지내신 사과공(司果公) 휘 사도(思道)께서는 대구 북산리(現 산격동 일원)에 세거하시면서 후손과 후학 양성에 큰 공적과 깊은 뜻을 남기셨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뜻을 이어받아 우리 후손들은 일신재(日新齋, 대구 산격동)를 통해 공의 인품과 큰 덕을 기리고 있습니다.

조선말의 유학자이자 영남의 거유(巨儒)로 널리 알려진 임재(臨齋) 휘 찬규(贊奎)께서는 과거에 급제하시고도 조정에서 내린 관직을 마다하시며 후진 양성에 평생을 바친 진정한 대유학자이시며, 공께서 남긴 임재일기(臨齋日記)는 당시 공의 인품과 활동, 조선과 구한말의 생생한 역사와 시대상을 올바로 이해하는 사료로도 크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전국 곳곳의 사적에 공의 기록과 흔적이 널리 전하는 것은 그 인품과 학문의 깊이를 충분히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말과 일제강점기에는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여 국권 회복을 도모한 독립운동가이자 대구근대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전하는 휘 상돈(相敦), 시서화 등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과 문화를 계승하는 활동으로 크게 추앙을 받는 팔능거사(八能居士) 석재(石齋) 휘 병오(丙五), 대구에서 일제에 대항하는 비밀조직을 결성한 애국지사 서상교(徐相敎) 옹 등도 널리 잘 알려져 있습니다.


2015년에는 일제강점기에 비녀와 가락지 등을 모두 모아 국채보상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남일패물폐지부인회(南一佩物廢止婦人會)의 여성 인물이 최초로 알려진 바가 있는데 서채봉, 정경주(徐丙珪의 妻) 여사 등 대부분 최초 여성 인물도 문중의 따님과 며느리였음을 사료를 통해 밝히기도 했습니다.


헌부(司憲府) 감찰(監察) 휘 목렬(穆烈)의 아들 휘 재승(在承)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경북의 영주 일대에서 일본에 맞서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하였고,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상일(相日)과 총독부 요인을 암살하려다 체포된 상한(相漢) 형제의 활약 또한 근대사에 널리 전하고 있습니다.


존하는 문중의 최초 족보(1702年 壬午譜)이자 당시 세자사부이자 영의정(領議政)이셨던 휘 문중(文重)에 의해 대구서씨세보(大丘徐氏世譜)라는 이름으로 발간된 대동보(大同譜)에 의하면, 달성서씨 경파(京派)로도 분류되는 대구서씨(大丘徐氏)는 고려 군기소윤(軍器少尹) 휘 한(閑)을 시조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구서씨 역시 우리 문중과 근원이 같음을 전제로 서로 분파된 시기와 계대(繼代)를 고증하기 위한 노력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존하고 있는 문헌 족보로 보면 대구서씨는 시조 휘 한(閑) 이후 2世부터 6世까지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었음을 이유로 전객사(典客使)를 지낸 7世 휘 익진(益進)을 중시조(中始祖)로 모시는 반면, 달성서씨는 휘 한(閑)의 증손(曾孫)으로도 알려져 있는 휘 진(晋)을 시조로 모시고 대동보(大同譜)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당시 대구서씨세보(大丘徐氏世譜)라는 보책으로 최초 발간된 임오보(壬午譜, 1702)는 달성서씨와 대구서씨는 그 유래가 같음을 전제하며 추후 고증이 필요하다는 서문(序文)을 달아 달성서씨를 별책(別冊) 합보(合譜)형태로 제작하여 발간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경파(京派)에서 1736년에 대구서씨라는 관향으로 경파 단독의 족보를 발간하게 됨에 따라, 1755년 달성서씨세보(達城徐氏世譜, 乙亥譜)라는 보책명으로 문헌상으로 두 번째 족보이자 '달성서씨'라는 본관을 사용한 첫 대동보가 발간된 이래, 1955년 을미보(乙未譜)에 이어 아홉 번째에 이르는 달성서씨 전자대동보(電子大同輔)구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선시대 간행된 만성보(萬姓譜)에서는 시조 휘 진을 대구서씨 시조 휘 한의 증손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조(朝鮮朝) 방목(榜目) 등 여러 고문헌에는 대구서씨(실록은 주로 '大丘人'으로 표현) 인물의 실제 관향은 모두 달성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와 같음에도 삼대 정승(政丞)에 이어 삼대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는 인물을 배출하여 조선 최고의 명문가를 자랑하는 달성서씨는
향파(鄕派, 達城徐氏)와 경파(京派, 大丘徐氏)로 족보는 분리하고 있으나, 선계(先系)가 같다는 점에서 일부 중소문중에서는 대구.달성서씨로 파보, 계보, 가승보 등을 발간하기도 합니다.

 

조실록의 명확한 기록으로는 조선 21대 영조 임금의 원비(元妃) 왕후이시며, 조선의 최장 재임 왕비로써 왕실 내명부(內命婦)를 큰 덕행과 인품으로 다스리신 정성왕후(貞聖王后)께서는 본관 달성(達城)의 기록이 명백하시니, 왕후의 아버님이자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이신 휘 종제(宗悌)로부터 상하계(上下系) 일족들의 본관이 다를 수가 없음에도 아버님과 따님의 본관을 다르게 칭하는 모순을 올바로 세우는 것도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진 중요한 과제라 하겠습니다.


리 달성서씨는 공히 7世 파조(派祖)를 기준으로 현감공파(縣監公派), 학유공파(學諭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 백진사공파(伯進士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계진사공파(季進士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 등의 총 9개 파종회(派宗會)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늘날까지 700년 문사(門史)에 이르도록 달성서씨대종회(達城徐氏大宗會, 대종회장 서영택)를 중심으로 상호 활발한 교류와 혈족(血族)으로서의 끈끈한 친목을 오래토록 잘 유지하고 있어 명실공히 천하에 수범이 되는 자랑스런 문중이라 할 것입니다.

 

 

[주요 집성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동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대구광역시 북구 태전동(이매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곽촌리


울산광역시 시내 일원


울산광역시 울주군 일원


경상남도 고성군 영오면 오동리


경상남도 밀양시 일원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좌삼리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조산리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일원

 

경상남도 거제시 일원

 

경상남도 통영시 연대리(연대도)


경상북도 포항시 구룡포읍 구만리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평천리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묵상리


경상북도 안동시 남후면 수하동


경상북도 경산시 중방동


경상북도 경산시 사동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읍 신당리(곽당)


전라남도 여수시(여천) 일원


전라남도 곡성군 일원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


충청북도 청주시 북이면 장재리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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