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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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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은 ((그 이전에 간행된 신찬팔도지리지(1432) 세종실록지리지(1454)  팔도지리지(1478)를 대본臺本으로 하여 성종12년(1481)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 다시 증산增刪 개수改修 증보增補를 거쳐)) 조선 중종25년(1530)에 완성된 관찬지지官撰地誌(이하 편의상 총지總誌라 함)입니다.

* 이런 총지는 읍지邑誌를 토대로 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총지는 읍지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으며 그 근본은 읍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총지와 읍지가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총지 편찬 당시의 정치적 또는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여러 이유로 토대가 되는 읍지에 첨삭添削과 개수改修를 하여 총지를 편찬하였기 때문입니다. 

* 읍지는 지방 각도各道의 각읍各邑에서 그 지역의 사실을 조사하고 파악한 뒤 그 읍에서 편찬한 것입니다. 

* 그러므로 읍지가 그 지역의 역사를 밝히는데 가장 적합한 문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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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권지이십육

新增東國輿地勝覽卷之二十六

 

대구도호부 동으로 경산현 경계까지 18리, 남으로 청도군 경계까지 47리, 서로 성주  경계까지 52리, 북으로 의흥현 경계까지 43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0리이다.

大丘都護府 東至慶山縣界十八里南至淸道郡界四十七里西至星州界五十二里北至義興縣界四十三里距京都六百七十里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달구화현인데 달불성이라고도 한다. (신라)경덕왕이 지금의 이름(대구大丘)으로 고쳐서 수창군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이 경산부에 붙였고, 인종이 현령을 두었다. 본조 세종 때에 승격시켜 군을 삼았고, 세조 때에 비로소 진을 두고 승격시켜 도호부를 삼았다.

建置沿革 本新羅達句火縣一作達弗城景德王改今名爲壽昌郡領縣高麗顯宗屬京山府仁宗置縣令  本朝  世宗朝陞爲郡  世祖始置鎭陞爲都護府

 

 

속현 수성현 부의 남쪽 12리에 있다. 본래 위화군 또는 상촌창군이라 하는데, 신라 경덕왕이 수창군으로 고쳤으며, 가창이라고도 하였다.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이 경주에 붙였으며, 공양왕 2년(1353)에 감무를 두어 해안현을 겸임하게 하였다. 본조 태조 3년(1394)에 감무를 폐지하여 대구에 내속 시켰다가 뒤에 다시 경주에 붙였고, 태종 14년(1414)에 다시 내속시켰다. 해안현 부의 북쪽 17리에 있다. 본래 치성화현 또는 미리라 하였는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장산군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이 경주에 붙였고 공민왕이 감무를 두어 수성 감무가 겸임하게 하였다. 본조 태조 3년에 감무를 폐지하여 내속시켰다가 뒤에 도로 경주에 붙였고, 태종 14년에 다시 내속시켰다. 하빈현 부의 서쪽 37리에 있다. 본래 다사지현 또는 답지라 했는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수창군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이 경산부에 붙였는데, 뒤에 내속시켰다. 또는 금호라고도 부른다.

屬縣 壽城縣在府南十二里本喟火縣一云上村昌郡新羅景德王改壽昌郡一作嘉昌高麗初改今名顯宗屬慶州恭讓王二年置監務兼任解顔本朝  太祖三年革監務來屬後還屬慶州  太宗十四年復來屬解顔縣在府北十七里本雉盛火縣一云美里景德王改名爲獐山郡領縣高麗顯宗屬慶州恭愍王置監務以壽城監務兼之本朝  太祖三年革監務來屬後還屬慶州  太宗十四年復來屬河濱縣在府西三十七里本多斯只縣一云沓只景德王改今名爲壽昌郡領縣高麗顯宗屬京山府後來屬別號琴湖

 

 

진관 도호부 1 밀양.  1 청도. 현 7 경산 하양 인동 현풍 의흥 영산 창녕이다. 『신증』 신령

鎭管 都護府一密陽郡一淸道縣七慶山河陽仁同玄風義興靈山昌寧新增新寧

 

 

관원 부사 교수 각 1인.

官員 府使  敎授各一人

 

 

군명 달구화 달성.

郡名 達句火  達城

 

 

성씨 본부에는 백(白) 하(夏) 배(裴) 서(徐) 이(李)가 토성(土姓)이고 도(都)는 들어온 성이다. 하빈에는 신(新) 이(李) 송(宋)이다. 수성에는 빈(賓) 나(羅) 조(曺) 혜(嵇)이다. 《주관육익에, “수성에 옛날에 3성(城)이 있었는데, 수대군, 일명 양성은 그 성(姓)이 빈(賓)이고, 구구성은 그 성이 나(羅)이고, 잉조이성은 그 성이 조(曺)와 혜(嵇)이다.” 하였다. 유(柳) 장(張) 최(崔) 신(申) 유(劉) 고(高) 정(鄭) 예(芮) 진(陳) 김(金) 이(李) 모두 들어온 성이다. 해안에는 모(牟) 백(白) 하(河) 신(申) 정(丁)이다 《육익》에 또한 말하기를, “성화성(省火城)은 모(牟)이고, 무가성은(無價城)은 신(申)이고, 불좌성(佛坐城)은 백(白)과 하(河)이고, 명성(鳴城)은 정(丁)이다.” 하였다. 제(諸) 진(秦) (朴) 모두 들어온 성이다. 한(韓)은 속성(續姓)이다자이(資已)에는 김(金)이 속성(續姓)이다.

姓氏 本府白夏裴徐李 都來  河濱申李宋  壽城賓羅曺周官六翼壽城古有三城壽大郡一名壤城其姓賓句具城其姓羅仍助伊城其姓曺柳張崔申劉高鄭芮陳金李幷來 解顔牟白河申丁六翼亦云省火城牟無價城申佛坐城白河鳴城丁諸秦朴幷來資已金


 

형승 땅의 형세가 평탄하고 넓다. 겹겹이 산봉우리가 둘러 있고 큰 내가 구불구불 얽혀 있으니, 사방에서 모이는 곳이다모두 김조의 금학루기에 있다.

形勝 地勢夷衍 疊周遭大川紆紫 四方之會幷金琴鶴樓記

 

 

산천 연귀산 부의 남쪽 3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읍을 창설할 때 돌거북을 만들어 산등성이에 남으로 머리를 두고 북으로 꼬리를 두게 묻어서 지맥을 통하게 한 까닭에 연귀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침산 부의 북으로 6리에 있다. 공산 팔공산이라고도 일컫는데, 해안현에서 북으로 17리에 있다. 신라 때에 부악이라고 일컫고, 중악(中岳 중국 숭산(嵩山)의 별칭)에 비겨 중사(中祀)를 지냈다. 둘러 있는 것은 부 및 하양 신녕 부계 인동 팔거 등의 읍이다. 마천산 하빈현에서 남으로 1리에 있는데, 일명 금성산이라고도 한다. 왕산 해안현에 있다. 팔조령 수성현에서 남으로 34리에 있다. 청도군 조에도 보인다. 입암 신천 가운데에 있다. 그 모양이 삿갓 같기 때문에 이름지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별이 떨어져서 돌이 되었다고 한다. 금호부의 서북으로 11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영천 보현에서 나오고, 하나는 무자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흘러 사문진으로 들어간다. 달천진 하빈현에서 동으로 16리에 있는데, 금호의 하류이다. 저탄 해안현에서 남으로 5리에 있는데, 금호의 상류이다. 신천 부에서 동으로 4리에 있다. 팔조령에서 나와서 금호로 들어간다. 성당지 부에서 남으로 10리에 있다. 동안진하빈현에서 서쪽으로 16리에 있다. 근원은 봉화현 태백산에서 나온다. 『신증』 행탄 하빈현에서 남으로 10리에 있다. 불상지 부에서 북으로 10리에 있다. 연화지 부에서 서쪽으로 5리에 있다.

山川 連龜山在府南三里鎭山諺傳建邑初作石龜藏于山脊南頭北尾以通地故謂之連龜砧山在府北六里公山或稱八公山在解顔顯北十七里新羅時稱父岳擬中岳爲中祀環而居者府及河陽新寧缶溪仁同八等邑也馬川山在河濱縣南一里一名錦城山王山在解顔縣八助嶺在壽城縣南三十四里亦見淸道郡笠巖在新川中其形如笠故名世傳星隕爲石琴湖在府西北十一里其源有二一出永川郡普賢山一出毋子山西流入于沙門津達川津在河濱縣東十六里琴湖下流猪灘在解顔縣南五里錦湖上流新川在府東四里出八助嶺入琴湖聖堂池在府南十里東安津在河濱縣西十六里源出奉化縣太白山新增杏灘在河濱縣南十里佛上池在府北十里蓮花池在府西五里

 

 

토산 붕어 은어 황어 백복령 감 잣 송이 죽전 왕산(王山)에서 난다. 호두 입초 지황 『신증』 잉어 지치 옻 석류 쇠무릎 구기자 인삼

土産 魚銀口魚黃魚白茯笭枾海松子松竹箭出王山胡桃笠草地黃新增鯉魚紫草漆石榴牛膝枸杞子人蔘

 

 

성곽 달성 부의 서쪽 4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 9백 44자, 높이 4자이다. 안에 우물 셋과 연못 둘이 있고, 군창이 있다.

城郭 達城在府西四里石築周九百四十四尺高四尺內有三井二池有軍倉

 

 

봉수 마천산 봉수 남으로 성주 화원현 성산에 응하고, 북으로 같은 주의 각산에 응한다. 법이산 봉수 수성현에 있다. 남으로 청도군 팔조현에 응하고, 북으로는 경산현 성산에 응한다.

烽燧 馬川山烽燧南應星州花園縣城山北應同州角山法伊山烽燧在壽城縣南應淸道郡八助縣北應慶山縣城山

 

 

누정 금학루 객관의 동북 모퉁이에 있다. ○ 김조의 기문에, “옛사람이 물건에 이름 붙이기를 혹은 그 땅에 말미암고, 혹은 그 사람 이름에 말미암는다. 파릉의 악양루로 말하면 그 땅 이름에 말미암았고, 저수의 취옹정은(취옹은 구양수의 아호)으로 말하면 그 사람 이름에 말미암았다. 지금 금후(금은 성, 후는 지방을 다스리는 장관)가 정사를 맡았으며 읍에 금호의 이름이 있고, 누의 그림이 학이 춤추는 형상이니, 이 누에 오르면 한 거문고와 한 학이 있어서 쇄락출진(洒落出塵)하는 기상이고, 성문화명(聲聞和鳴)하는 멋과 남풍해온(南風解慍)하는 즐거움이 있다. 금학으로써 그 누각을 이름 지음이 옳겠도다. 드디어 나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니, 내가 말하기를, ‘예전에 백성을 잘 다스린 사람은 덕을 숭상하고 법을 숭상하지 않았으며, 너그러움에 말미암고 사나움에 말미암지 않았다. 언자(言子)의 운율의 다스림복자(宓子)가 거문고를 타며 영천의 다스림으로 말하면, 그 공효가 봉황래의(鳳凰來儀)에 이르렀으니, 옛 사람의 정치를 알 것이요. 이제 후가 달구를 다스림은 신이 흡족해서 사람들이 화목하고, 간사하고 교활한 자가 공경하여 속이지 않고, 홀아비와 홀어미가 편안하여 원망하지 않고, 예악이 일어나서 소송이 적어졌으니, 덕을 숭상하고 법을 숭상하지 않으며, 너그러움에 말미암고 사나움에 말미암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하였다.” 하였다. ○ 강진덕의 시에, “땅이 넓어 사람이 많이 살고, 다락이 높아서 시계가 밝구나. 학은 능히 구름과 함께 가고, 거문고는 달과 같이 맑구나.” 하였다. ○ 일본 중 경양의 시에, “그림 그린 들보의 나는 듯한 가에서는 학의 여윈 그림자를 보고, 붉은 난간의 굽은 곳에서는 거문고의 남은 소리를 듣네. 맑은 바람 밝은 달은 천년의 모습이요, 흐르는 물 높은 산은 태고의 마음일세.” 하였다.

樓亭 琴鶴樓在客館東南隅記古人之名物或因其地或因其名若巴陵之岳陽因其地也若之醉翁因其人也今琴侯政而邑有琴湖之名樓繪鶴舞之狀登玆樓也則有一琴一鶴灑落出塵之氣像矣有聲聞和鳴之趣南風解之樂矣其名樓以琴鶴可乎遂命予記之予謂古之善治民者尙德不尙法由寬不由猛若言子絃歌之治宓子彈琴而川之治化其效至於鳳凰來儀則古人之政可知矣今侯之治達句也信孚而人和奸猾敬而不欺鰥寡安而無怨禮樂興而詞訟簡其爲尙德而不尙法由寬而不由猛也審矣姜進德詩地大人居密樓高眼界明鶴能雲共去琴與月俱淸日本僧慶陽詩畵棟飛邊看瘦影朱欄曲處聽遺音淸風明月千年能流水高山太古心

 

 

학교 향교 부에서 동으로 2리에 있다.

學校 鄕校在府東二里

 

 

역원 범어역 부에서 동으로 9리에 있다. 금천역 하빈현의 서쪽 1리에 있다. 낙중원 부에서 남으로 3리에 있다. 대로원 부의 서쪽 6리에 있다. 사부원 부의 서쪽 10리에 있다. 관방원 부에서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마천원 하빈현에서 남으로 4리에 있다. 남천원 하빈현에서 서쪽으로 1리에 있다. 오원 부에서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박실원 부에서 서쪽으로 26리에 있다.

驛院 於驛在府東九里琴川驛在河濱縣西一里洛中院在府南三里大櫓院在府西六里沙阜院在府西十里觀方院在府西二十里馬川院在河濱縣南四里南川院在河濱縣西一里梧院在府南三十里朴實院在府西二十六里

 

 

불우 동화사 공산에 있다. 고려 김훤이 지은 중 홍진의 비명이 있다. 지장사 수성현에 있다. 고려의 김황원의 기문이 있다. 선사암 마천산에 있다. 암자 곁에 최치원(崔致元)이 벼루를 씻던 못이 있다. 부인사 자화사 파계사 보리사 모두 공산에 있다.

佛宇 桐華寺在公山有高麗金所撰僧弘眞碑銘地藏寺在壽城縣有高麗金黃元記槎菴在馬川山菴傍有崔致遠洗硯池夫人寺慈華寺把溪寺菩俱在公山

 

 

사묘 사직단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부의 동쪽에 있다. 여단 부의 북쪽에 있다.

祠廟 社稷壇在府西文廟在鄕校城隍祠在府東在府北

 

 

고적 공산성 공산의 동쪽에 있는데, 부에서 30리 떨어졌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5백 60척이고, 높이가 4척이며, 안에는 샘이 2, 도랑이 3개 있다. 미리사 해안현에 있다. 혹은 해안을 미리라고도 한다. 견훤이 신라의 서울 가까운 곳에 닥쳐오니, 경애왕이 고려에 구원을 빌었는데, 견훤이 갑자기 신라의 서울에 들어와서 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고, 국고의 보배와 무기를 다 취하였고, 자녀들과 여러 공장 중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따라서 귀의하였다. 고려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으로 공산 아래 미리사 앞에서 견훤을 맞아 크게 싸우니, 장군 김락과 신숭겸이 죽고 여러 군대가 패배하여 태조는 겨우 몸을 피하였다. 자이소 해안현에서 북으로 20리에 있다. 성불산고성수성현에서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51척이다. 지금은 없어졌다.

古跡 公山城在公山東距府三十里石築周一千五百六十尺高四尺內有泉二渠三美理寺在解顔縣或云解眼一名美理甄萱逼新羅郊畿景哀王求救於高麗萱猝入新羅京都王立敬順王盡取國帑珍寶兵仗子女百工之巧者自隨而歸太祖以精騎五千要萱於公山下美理寺前大戰將軍金樂申崇謙死之諸軍敗北太祖僅以身免資已所在解顔縣北二十里成佛山古城在壽城縣西十里石築周三千五十一尺今廢

 

 

명환 본조 금유 옥고 모두 군수였다. 군의 아전 배설이 교활하고, 눈치가 빠르고 민첩하며 법률 조문을 멋대로 해석하며 남용하여 수령들이 많이 그에게 의지해서 정치를 했는데, 배설이 만년에 남에게 말하기를, “전후의 수령들을 내가 모두 거느리고 살았는데, 오직 금유와 옥고는 모시고 살았다.” 했다. 『신증』 신엄.

名宦 本朝 琴柔 玉沽俱爲知郡郡吏裵泄狡猾而機警舞文守令多倚而爲政泄晩年謂人曰前後守令我皆率唯琴柔玉沽侍居耳新增申儼

 

 

인물 고려 빈우광 수성현 사람으로,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고, 또 중국 과거에 3등으로 합격했다. 관직은 한림에 이르렀다. 이익과 영달을 구하지 않고 산수로써 스스로 즐기면서 생애를 마쳤다. 필법이 당대에 이름났다. 배정지 충렬왕 때에 인후를 따라 연기현에서 합단을 쳤는데, 칼을 빼어 말을 달리니 가는 곳마다 적이 쓰러졌다. 화살이 날아와서 보거(광대뼈와 아랫이틀 사이)를 꿰뚫자 상처를 싸매고 다시 싸워서 포로와 목 자른 것이 매우 많았다. 생김새가 멀쑥하고 장대하였으며, 사람들이 모두 그의 무략에 탄복했다. 입으로는 이익을 말하지 않았으며, 관직은 밀직부사에 이르렀다. 서균형(徐鈞衡) 관직은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본조 서거정 갑자과에 합격하고 또 중시 발영 등준의 3과에 뽑혔다. 좌리공신에 들었고, 관직은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달성군을 봉하고, 시호는 문충이다. 시문을 지음에 어휘가 풍부하고 민첩하여 저술한 것이 많고, 홍문관 대제학이 된 것이 모두 26년이었다. 중국 호부 낭중 기순이 일찍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는데, 거정이 접반사가 되어 시를 주고받되 붓을 멈추지 않자 기순이 탄복했다. 사신이 돌아가서 그 재능을 칭찬하고, 우리 사신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안부를 물었다. 사가집 동인시화 필원잡기 태평한화가 있어 세상에 전한다.

人物 高麗 賓于光壽城縣人擢魁科又中中朝制科第三人官至翰林不求利達以山水自娛以終其身筆法名一世裴廷芝忠烈朝從印侯擊哈丹于燕岐縣拔躍馬所向坡靡流矢貫輔車瘡復戰俘馘甚衆軆貌魁梧人皆服武略口不利官至密直副使言徐鈞衡官至政堂文學 本朝 徐居正中甲子科又擢重試拔英登俊三科參佐理功臣官至議政府左贊成封達城君諡文忠爲詩文贍敏多所著述主文衡凡二十六年戶部郎中祁順嘗奉使于我居正爲接伴酬唱筆不停輟順歎服使還稱其能每遇我使必問安否有四佳集東人詩話筆苑雜記太平閒話行于世

 

 

효자 고려 하광신 명종 때 사람인데, 어머니를 섬기기에 효성을 지극히 하고, 여묘살이를 3년 하였다. 태정 계묘년에 정려하였다. 조희삼 수성현 사람인데, 관직은 군기소윤에 이르렀다. 홍무 15년(1382)에 어머니를 부축하고 왜란을 피하였는데, 경산부 가리현에 이르러 강물이 불어서 건널 수 없는데, 적이 쫓아오니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 “나는 늙고 병들었으니 죽어도 후회가 없다. 너는 말을 달려 피하는 것이 옳다.” 하니, 희삼이 말하기를 , “어머님이 계신데 제가 어찌 가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그 어머니와 더불어 밭 사이에 숨었는데, 적이 칼을 뽑아 그 어머니를 치려하자, 희삼이 몸으로 가려서 적에게 죽고 어머니는 죽음을 면하였다. 김한 해안현 사람이다. 어릴 때 그 아버지가 죽었는데, 늘 상례를 다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더니, 어머니가 죽자 여묘살이 3년을 마치고, 그 아버지를 이장하고 또 3년을 살았다. 나무로 부모의 모습을 새겨서 두 무덤 사이게 두고 큰 농을 짜서 그 앞에 놓고 그 속에서 살았는데, 부모의 나서 길러주고 보살펴준 은혜를 생각하여 밤낮으로 울부짖었다. 어떤 큰 호랑이가 농 곁에 왔으나 오히려 움직이지 않자 호랑이는 얼마 있다가 가버렸다. 채순 수성현 사람이다. 어머니가 죽었으나 아버지가 살아 있기 때문에 무덤을 지킬 수 없었는데, 아버지가 죽자 여묘살이하고 이듬해 그 어머니를 아버지 곁에 이장하여 아침 저녁 상식을 올려 6년에 마쳤다. 본조 박득춘 해안현 사람이다. 부모를 위하여 여묘살이 6년을 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중추원 녹사 벼슬을 내리고 정려했다.

孝子 高麗 夏光臣明宗時人事母至孝廬墓三年泰定癸卯旌門曺希參壽城縣人官至軍器少尹洪武十五年扶母避倭亂至京山府加里縣江漲不得渡賊追及之其母曰吾老病死無恤矣汝可走馬以免希參曰母在子何往遂與其母伏於田間賊拔將擊其母希參以身蔽之爲賊所割母得以免金閑解顔縣人幼時其父死常以未盡喪禮爲恨及母死居廬三年畢遷葬其父又居三年以木刻父母形置雙墓間織大籠置其前處其中念父母生育顧復之息日夜號慟有大虎來吼籠側猶不動虎尋去蔡順壽城縣人母沒以父在不得守墳及父沒居廬翼年移葬其母於父側奠朝夕以終六年本朝朴得春解顔縣人爲父母居廬六年事聞授中樞院錄事旌閭

 

 

열녀 본조 서씨(徐氏) 낭장 김내정의 아내이다. 나이 24세에 내정이 죽었는데, 절개를 지켜 두 남편을 섬기지 않았다. 태종 때에 정려하고 복호(부역을 면해 줌)하였다.

烈女 本朝 徐氏郎將金乃鼎妻也年二十四乃鼎死守節不二  太宗朝旌門復戶

 

 

제영 영각서풍청 금유의 시에, “군을 위해 몸이 피곤하더니, 다락에 오르니 눈이 트이네. 금호에 새 물이 가득하고, 영각에 여름 바람이 맑네. 감히 현가의 정치를 바랄까마는, 조수의 영달일랑 뽐내지 마라. 3년토록 조금도 공이 없으니, 붓을 놀려 부질없이 정만 머금네.” 하였다. 십영 서거정의 시이다. 금호범주 “금호의 맑고 얕은 곳에 난주(나무 난간이 있는 배로 일반적으로 놀잇배를 뜻함)를 띄우니, 차츰 한가히 가서 백구에 가까울사. 한껏 취해 달 밝은데 노저어 되돌아가니, 풍류란 반드시 오호(중국의 경치 좋은 다섯 호수)에 노는 것이 아닐세.” 하였다. 입암조어 “가랑비 자욱히 가을 물가에 내리는데, 낚싯줄 드리우고 홀로 앉아 하염없이 생각하네. 잔 고기는 낚싯밥 아래 다소 있음을 알겠는데, 금오를 낚지 못해 멈추지 않네” 하였다. 귀수춘운 “거북 봉우리가 흐릿하여 큰 자라 봉우리 같구나. 구름이 무심히 나온다지만 또한 뜻이 있더라. 대지의 생령들이 바야흐로 바라고 있는데, 뜻 없이 단비를 만든다 하랴.” 하였다. 학루명월 “한 해 열두 번 둥근 달 중에, 추석에 한껏 둥근 달을 기다려 얻네. 또한 긴 바람이 구름 쓸어 가버리니, 온 다락에 조그만 요기(妖氣)도 붙일 곳 없네.” 하였다. 남소하화 “물에 돋아난 어린 연꽃은 작은 돈짝을 겹쳐 놓은 듯한데, 꽃이 피면 끝내 배 보다 크네. 재질이 커서 쓰이기 어렵다 말하지 마라, 고질병을 보내어 만성을 고치기에 알맞으니.” 하였다. 북벽향림 “옛 벽의 푸른 향나무는 옥삭(옥으로 만들거나 혹은 옥색의 창)같이 길고, 긴 바람이 끊임없어 사시에 향기롭구나. 은근히 다시 가꾸어 힘을 붙이면, 머물러 맑은 향기를 온 고장에 함께 할 수 있으리.” 하였다. 동사심승 “멀리 절에 올라가는 돌층계 길엔, 등나무에 흰 버선에 또 검은 지팡이로다. 이렇게 흥겨운데 알아주는 이 없네. 하기야 흥이 청산에 있지 중에 있진 않거니.” 하였다. 노원송객 “관도(국도)에 해마다 버들 빛이 푸르고, 단정(작은 숙사)과 장정(큰 숙사) 수없이 길게 이었네. 양관(중국의 관문 이름으로 이별의 상징으로 쓰임)의 송별곡을 다 부르고 각각 흩어지니, 모래밭 가에 두 흰 술 병만 누었구나.” 하였다. 공령적설 “공산 천 길에 울퉁불퉁 산이 겹쳐 의지했는데, 쌓인 눈이 하늘을 적셔 이슬이 맑구나. 신사에 신령이 응당 있음을 알겠고, 해마다 삼백(정월에 내리는 눈)이 내려 풍년을 얘기하네.” 하였다. 침산만조 “물은 서쪽에서 산 밑으로 흐르고, 침산은 푸르러 맑은 가을에 붙었구나. 저녁 바람에 어디에서 방아 소리가 급한고, 비낀 해에 일임하여 나그네의 수심을 찧네.” 하였다.

題詠 鈴閣暑風淸琴柔詩爲郡身疲倦登樓眼豁明琴湖新水滿云云敢望絃歌治休誇組綬榮三年無村效操筆漫含情十詠徐居正詩琴湖泛舟琴湖淸淺泛蘭舟取次閑行近白鷗盡醉月明回棹去風流不必五湖遊笠巖釣魚煙雨空濛澤國秋垂綸獨坐思悠悠纖鱗餌下知多少不釣金鰲釣不休龜峀春雲龜峯隱隱似鰲岑雲出無心亦有心大地生靈方有望可能無意作甘霖鶴樓明月一年十二度圓月待得中秋圓十分更有長風雲去一樓無地着纖南沼荷花出水新荷疊小錢花開畢竟大於船莫言才大難爲用要遣沈疴萬姓痊北壁香林古壁蒼杉玉槊長長風不斷四時香慇懃更着栽培力留得淸芬共一鄕桐寺尋僧遠上招提石徑層靑幐白襪又烏藤此時有興無人識興在靑山不在僧櫓院送客官道年年柳色靑短亭無數接長亭唱盡陽關各分散沙頭只臥雙白甁公嶺積雪公山千丈倚峻層積雪漫空沆瀣澄知有神祠靈應在年年三白瑞豊登砧山晩照水自西流山盡頭砧巒蒼翠屬淸秋晩風何處舂聲急一任斜陽搗客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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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고읍  풍각(豐角) 남으로 70리인데, 동남쪽으로는 밀양(密陽)과 50리 떨어져 있다. 본래 신라 상화촌(上火村)인데,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유산(幽山)으로 고쳐 화왕군(火王郡)의 영현으로 삼았으며, 고려 태조(太祖) 23년(940)에 풍각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1018)에 밀성(密城)에 속했으며, 본조 현종 조에 내속했다. 화원(花園) 서남쪽으로 30리이며, 서쪽으로 성주(星州)와 70리 떨어져 있다. 본래 신라의 설화(舌火)인데, 경덕왕 16년에 화원으로 고쳐 수창군(壽昌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경산부(京山府)에 속했으며, 후에 본부(本府)로 옮겨 속하고, 그 후에 경산부로 다시 속했다. 본조 숙종조에 다시 본부로 속하게 하고 읍호(邑號)를 금성(錦城)이라 하였다.
방면  동상(東上) 끝은 5리이다. 동중(東中)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동하(東下)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서상(西上) 끝은 5리이다. 서중(西中)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5리이다. 서하(西下)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감물천(甘勿川) 서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옥포(玉浦) 서쪽으로 처음은 3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월배(月背) 남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조암(阻巖) 남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25리이다. 법화(法華) 서남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성평곡(省平谷) 서남쪽으로 처음은 35리이고, 끝은 45리이다. 수현내(守縣內) 동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수동(守東) 동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수북(守北)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상수남(上守南) 남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하수남(下守南) 남쪽으로 처음은 3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상수서(上守西) 남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하수서(下守西) 남쪽으로 처음은 8리이고, 끝은 10리이다. ○ 앞의 7면은 수성(壽城) 고현 땅이다. 해동촌(解東村) 동북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해북촌(解北村) 북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해서부(解西府) 북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해서촌(解西村) 북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 앞의 4면은 해안(解顔) 고현 땅이며, 지금은 금호강(琴湖江) 북쪽이다. 하동(河東) 서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하서(河西) 서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하남(河南) 서쪽으로 처음은 3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하북(河北) 서북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다. ○ 앞의 4면은 하빈(河濱) 고현 땅이며, 금호강 북쪽에 있다. 각현내(角縣內) 남쪽으로 끝은 70리이다. 각북(角北) 남쪽으로 처음은 50리이고, 끝은 70리이다. 각초동(角初同) 남쪽으로 처음은 70리이고, 끝은 1백리이다. 각이동(角二同) 남쪽으로 처음은 80리이고, 끝은 1백 리이다. 각남(角南) 남쪽으로 처음은 70리이고, ○ 앞의 5면은 풍각(豐角) 고현 땅이다. 화현내(花縣內) 서남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35리인데, 즉 화원(花園) 고현 땅이다. ○ 두야보부곡(豆也保部曲)은 풍각 고현에 있다. 자이소 해안현(資已所解顔縣)은 북쪽으로 20리이다.
성지  읍성(邑城) 본조 영종(英宗) 12년(1736)에 쌓았으며, 둘레가 2천 1백 24보이고, 우물이 다섯이다. 성불산고성(成佛山古城) 수성(壽城) 고현 서쪽 10리이다. 둘레가 3천 51척이다. 마천산고성(馬川山 古城) 서쪽으로 35리이다. 하빈(河賓) 고현 남쪽 1리에 유지(遺址)가 있으며, 금성(錦城)이라 부른다. 화원고성(花園古城) 고현 북쪽 5리에 있으며, 성산(城山)이라 부른다. 구위성(舊倭城).
영아   순영(巡營) 태조(太祖) 원년(1392)에 안렴도관찰(按廉都觀察) 출척사(黜陟使)의 영(營)을 상주(尙州)에 설치했다. 태종(太宗) 원년(1400)에 다시 안렴사(按廉使)를 삼았고, 세조(世祖) 11년(1465)에 고쳐서 관찰사(觀察使)라 불렀다. 중종(中宗) 13년(1518)에 본도의 일이 번잡하다 하여 좌우도 관찰사(左右道觀察使)로 나누었는데 동년에 다시 합했다. 선조(宣祖) 25년(1592)에 왜적이 모략질하고 약탈하여 도로가 불통하였으므로 또 좌영과 우영으로 나누었는데, 좌영은 경주(慶州)에 설치하고, 우영은 상주(尙州)에 설치하였다가 26년에 다시 합쳐 영(營)을 성주(星州)의 팔거(八莒) 고현에 설치하니, 즉 총병(總兵) 유연(劉綖)이 진(陣)을 주둔했던 곳이다. 28년에는 땅이 넓어 다스리기가 곤란하다고 하여 다시 좌우로 나누었으며 29년에 다시 합하여 달성(達城)에 영을 설치하고 이어 석축(石築)을 더하였다. 30년에는 병화(兵火)로 인하여 또 파했는데, 31년에 관찰사 한준겸(韓浚謙)과 체찰사(體察使) 이덕형(李德馨)이 대구(大邱)와 성주(星州)를 한 도(道)로 하니, 백성의 피폐함이 가시지 않으므로 안동부에 유영(留營)하자고 하였다. 34년에는 체찰사가 다시 본부(本部)로 영을 옮기자고 청하였다.
관원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대구도호부사(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大邱都護府使)와 도사 중군 겸 토포사 심약검률(都使中軍兼討捕使審藥檢律) 각 1인. ○ 중영(中營)은 인조(仁祖)조에 설치했다. ○ 중영장 1인. ○ 속읍(屬邑)은 밀양(密陽)ㆍ인동(仁同)ㆍ칠곡(漆谷)ㆍ청도(淸道)ㆍ경산(慶山)ㆍ하양(河陽)ㆍ현풍(玄風)ㆍ신녕(新寧)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ㆍ의홍(義興)ㆍ자인(慈仁)이다.
봉수  성산(城山) 봉수 화원(花園) 고현이며, 북쪽으로 5리이다.

창고  사창(司倉)ㆍ영창(營倉)ㆍ수성창(修城倉)ㆍ고륙(庫六) 모두 읍내에 있다. 남창(南倉) 남쪽으로 15리이다. 하창(河倉) 하서면(河西面) 낙동강(洛東江) 가이다. 강창(江倉) 금호(琴湖)가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남쪽 연안이다. 풍찰(豐倉) 풍각(豐角) 고현에 있다. 해창(解倉) 북쪽으로 10리이다. 화원창(花園倉) 고현 남쪽에 있다. 대혜창(大惠倉) 선산(善山)에 있다. 팔거창(八莒倉).
역참  설화역(舌火驛) 화원 고현 서쪽 5리이다. 유산역(幽山驛) 풍각 고현에 있다. 보발(步撥)ㆍ관문참(官門站)ㆍ오동원참(梧桐院站).
진도  사문역(沙門驛) 금호강(琴湖江)이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이며, 서쪽은 성주(星州)와 통한다. 금호진(琴湖津) 서북쪽으로 10리이며, 북쪽은 칠곡(漆谷)과 통한다.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토산  입초(笠草).

누정  관풍루(觀風樓)ㆍ척금루(滌襟樓)ㆍ점풍루(占豐樓)ㆍ읍북루(挹北樓) 모두 읍내이다. 임수정(臨水亭) 서남쪽으로 35리이다. 하목당(霞鶩堂) 낙동강가 경치가 훌륭하다.
사원  연경서원(硏經書院) 명종(明宗) 갑자년(1564)에 건립하고, 현종(玄宗) 갑자년(1660)에 사액하였다. 이황(李滉) 문묘 조에 보인다. 정술(鄭述) 충주(忠州) 조에 보인다. 정경세(鄭經世) 상주(尙州) 조에 보인다. ○ 낙빈서원(落濱書院) 숙종 기미년(1679)에 건립하고 갑술년(1694)에 사액하였다.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門)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모두 과천(果川) 조에 보인다. ○ 표충사(表忠祠) 현종 경술년(1670)에 건립하고 숙종 정묘년(1687)에 사액하였다. 신숭겸(申崇兼) 마전(麻田) 조에 보인다. 김낙(金樂) 순천 사람으로,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주D-001]쇄락출진(洒落出塵) : 쇄락은 물뿌린 듯이 차고 모습이 깨끗한 것이요, 출진은 더러운 세상을 버리는 것이다.
[주D-002]성문화명(聲聞和鳴) : 성문은 학이 깊은 못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는 뜻이요, 화명은 학이 그늘에서 우니 그 새끼가 화답해 운다는 뜻이다.
[주D-003]남풍해온(南風解慍) : 순(舜) 임금의 거문고 가락 남풍가(南風歌) 중에, “여름 바람의 향기로움이 우리 백성의 걱정을 풀어줄 만하다.[南風之薰兮可以解吾民之慍兮]”에서 온 말.
[주D-004]언자(言子)의 현가(絃歌)의 정치 : 공자의 제자 언언(言偃)이 무성(武城)의 원이 되어 예악(禮樂)으로 교화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05]복자(宓子)가 탄금(彈琴)하여 교화한 것 : 공자의 제자 복불제(宓不齊)가 선보(單父)의 원이 되어 거문고를 타면서, 관아의 당(堂)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도 잘 다스렸다는 고사가 있다.
[주D-006]영천(穎川)의 정치 : 한(漢) 나라의 황패(黃霸)가 영천 태수로 선치하여 한 나라 때에 가장 백성을 잘 다스린 사람으로 이름이 있었다.
[주D-007]봉황래의(鳳凰來儀) : 《서경(書經)》에, “소소(簫韶 순 임금의 음악)가 9악장(樂章)을 마치니, 봉황이 와서 거동하였다.[簫韶九成鳳凰來儀]”고 하였으니, 곧 예악의 극치를 말한다.
[주D-008]조수(組綬) : 벼슬을 하여 귀하게 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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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스터 2019.08.13 21:02
    구한 자료에 대해 국역하신 수고로 요긴하게 내용을 잘 보았습니다.
    수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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