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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실족보(王室族譜)

 

가. 왕실족보의 개념

조선왕실 족보는 개국 직후인 태종조부터 작성되기 시작했다.

처음 왕실족보는 종친록(宗親錄)과 유부록(類附錄)으로 구별되었다. 종친록은 특정 왕의 남계후손(男系後孫)을 9대까지 수록했다. 유부록은 특정 왕의 여계후손(女系後孫)을 6대까지 수록했다.선원계보2.jpg

  9대까지의 남계후손과 6대까지의 여계후손이 왕실족보의 수록대상이 된 이유는 이들이 의친(議親)으로서 국가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의친이 형사·행정·경제·군사상의 특혜를 부여받았으며 국가에서는 그 근거자료로서 종친록과 유부록을 작성했다.

숙종조에 이르러 종친록과 유부록을 종합한 선원계보기략이 작성되기 시작하여 조선후기의 왕실족보를 대표하게 되었다. 선원계보기략은 숙종조부터 망국 직전인 1908년까지 250여 년 간 114회에 걸쳐 막대한 양이 작성되었다. 이는 국가의 족보로 인식되어 사고(史庫)에 비장했다.

그런데 『선원계보기략』은 특정 왕의 내외후손을 6대까지만 수록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내외후손은 각 파별로 작성되는 파보(派譜)에 수록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으로 조선후기에 유수한 가문에서 대동보를 작성하는 데도 전주이씨 전체를 포괄하는 대동보를 만들 수가 없었다.

1790년(정조 14)에는 유학 이헌휘(李憲徽) 등이 상소해 전주이씨의 대동보를 작성하자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선원계보기략』은 국가의 족보인데, 여기에 규정 이상의 모든 전주이씨를 수록하여 대동보로 만들고 이를 각 가문에 소장하도록 한다는 것은 국가의 취지에 어긋난다고 하여 허락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왕실 족보는 일반적인 의미의 족보와는 성격이 매우 달랐다. 족보는 본래 친족간에 서로 알기 위해 작성하는 것이지만, 왕실 족보는 친족 상호 간에는 볼 수 없었고 왕의 친인척을 담당하는 국가 기관에서 주요 인사를 파악하는 용도로만 이용하였으므로, 오히려 인사 기록에 해당되는 것으로 매우 정확한 근거에 의해 작성된 사료로서 국가 기록물로 보존되고 있다.
왕실 족보는 새로 출생하거나 사망한 왕의 친인척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3년마다 수정, 작성되었다. 이 결과 조선시대의 왕실 족보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방대한 양을 갖게 되었다. 현재 왕실 족보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 5,400여 책,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4,400여 책이 있어 모두 1만 책에 이른다.
왕의 친척, 즉 왕의 남녀 후손을 기록한 족보에는 보통 선원(璿源)이라는 용어가 들어갔다. 선(璿)이란 아름다운 옥이란 의미이며, 선원은 왕을 상징하는 선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후손이란 뜻이다.
조선조 왕실족보는 종부시(宗簿寺)와 돈녕부(敦寧府)에서 작성하였다.

 

 

  나. 왕실족보의 분류
선원록류(璿源錄類)
종부시는 <종친록(宗親錄)>, <유부록(類附錄)>, <선원록(璿源錄)>, <가현록(加現錄)>,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왕비세보(王妃世譜)> 등을 작성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선원록류(璿源錄類)라 할 수 있다.

선원록.jpg

 

선원록류가 작성되기 시작한 것은 태종대 부터였다. 이전의 왕실 족보는 조상과 후손을 모두 기록하였는데, 태종은 이를 개국 이전의 전주 이씨, 왕의 아들, 딸로 각각 분할하여 작성토록 하였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기존의 족보에는 조선왕실의 시조 이한(李翰)을 비롯하여 이원계(李元桂), 이화(李和) 등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제들도 수록되어 있었다. 이같은 왕실족보가 태종 12년에 <선원록(璿源錄)>, <종친록(宗親錄)>, <유부록(類附錄)>의 세가지로 분할 작성되었다. 왕실족보가 분리 작성된 직접적인 요인은 태종이 자신의 사후에 일어날 지도 모를 왕위계승 분쟁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선원록>에는 시조 이한으로부터 태종자신까지의 직계만을 수록하고, <종친록>에는 태조 이성계와 자신의 적자만을 수록하며, <유부록>에는 딸들과 서자들을 수록하였다.
그러나 태종 이후 어느 순간부터 <종친록>에는 적서 구분 없이 왕의 아들 모두를, <유부록>에는 딸들만을 기록하였다. 숙종대에는 기존의 <선원록>,<종친록>,<유부록>을 종합하는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이 작성되기 시작하였고, 여기에는 왕의 내외 후손 모두 동일하게 6대까지 조사, 기록되었다. 이것이 조선 후기의 왕실 족보를 대표하였다. <선원계보기략>은 숙종 5년(1679)부터 1908년까지, 230년에 걸쳐 막대한 양이 작성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왕실 족보의 많은 부분은 <선원계보기략>이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 선원록류는 왕실 족보이자 국가의 족보로 인식되어 사고(史庫)에 보관되었다.

선원속보(璿源續譜)
조선왕실의 대동보로서 『선원속보』가 작성되기 시작한 것은 1860년(철종 11)에 이르러서이다. 철종은 대동보를 작성해야 한다는 전주이씨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친족을 돈독히 한다는 명분으로 족보 간행을 시작했다.

『선원속보』의 간행을 주관한 곳은 종친부였으며 대한제국기에는 종친부의 후신인 종정원(宗正院)에서 주관했다. 『선원속보』는 각 파별로 파보를 만들고 이를 종합하는 대동보의 형태를 취했다. 수록 범위는 전주이씨 전체로서, 각 파별(派別)로 파조(派祖)가 되는 대군이나 군 이하의 당시까지 생존한 사람들까지 포함되었다.

파보는 각 파의 문장(門長)이 주관해 각 지역의 족파로부터 단자(單子)를 받아 근거자료로 이용했다. 『선원속보』를 간행하는 데 필요한 경비는 단자를 내는 사람들로부터 명전(名錢)과 책가(冊價)를 받아 충당했다. 『선원속보』는 목활자(木活字)로 간행되었다.

체제는 범례가 맨 앞에 있고 이어 6단의 세보(世譜)가 차례로 실려 있다. 범례는 15항목으로, 작성원칙을 밝힌 것이다. 족보의 매장마다 천자문(千字文) 글자가 달려 있어 열람에 편하게 했다. 끝에 각 파의 족보를 책임진 종손, 문장, 유사 등의 직명이 기록되어 있다.

1860년(철종 11)에 작성되기 시작한 『선원속보』는 8년 만인 1867년(고종 4)에 완성되었다. 이때 『선원속보』의 양은 전주이씨 102파의 파보를 종합한 350권에 이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한국정신문화원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다.

돈녕보첩(敦寧譜牒)과 왕비세보(王妃世譜)
왕의 인척을 기록한 왕실 족보는 왕비 가문을 관리하던 곳이 돈녕부(敦寧府)였기 때문에 <돈녕보첩>이라고 하였다. <돈녕보첩>도 선원록류와 마찬가지로 3년마다 대상자들을 조사하여 새로 작성하였는데. 왕비의 친정 9대까지 기록하였다.

돈녕보첩.jpg


<돈녕보첩> 이외에도 왕비 가문을 기록한 족보에는 <왕비세보(王妃世譜)>가 있었다. <왕비세보>는 숙종 7년(1681) 이전에 이미 작성된 전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숙종 7년 당시에 전해지지 않아서 선원록(璿源錄) 및 어첩(御牒) 등을 작성하면서 참고자료로 이용하기 위하여 작성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에 걸쳐 수정되었다. <왕비세보>는 일반 족보류와 달리 각 왕비의 부모부터 시작하여 조부모, 증조부모 등을 거쳐 시조에 이르는 직계를 수록하였다. 왕비의 부모에 관해서는 묘비명(墓碑銘)이나 신도비문(神道碑文) 등을 첨부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성명, 직함, 생졸년, 과거 합격 연도, 무덤 위치 등 중요한 정보만 수록하였다. 그 내용은 왕비 가문의 후손들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집안의 내력을 확인하기 위한 참고자료로 활용되었다.

 

 

2. 사례소개 : 대구서씨 족보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

 

위키백과사전 ‘서종태(徐宗泰)’

서종태(徐宗泰, 1652년 ~ 1719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대구.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노론의 핵심 대신이었지만, 소론이었던 영의정 서문중과도 가까웠다. 훈구파 대신인 서거정의 후손이다.

숙종 경신환국 이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홍문관정자, 홍문관저작, 홍문관박사 등 옥당을 지내고, 수찬, 헌납, 교리, 이조좌랑, 지평, 부교리, 부응교, 집의, 사간, 응교 등 대간과 옥당, 청요직을 거쳐 승지와 대사간을 하지만 기사환국으로 벼슬에서 퇴출되지만 갑술환국 이후 사간원 대사간으로 복직해, 이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다시 한 번 승지와 이조참의, 대사성을 하고 대사헌, 부제학, 이조참판, 예조참판, 판결사를 거쳐 다시 사헌부 대사헌과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판과 성균관 대사성, 공조참판, 이조참판, 예조참판,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지관사를 하다가 사헌부 대사헌과 홍문관 대제학, 호조참판을 거쳐 이후 좌참찬, 대제학, 예조판서를 거쳐 다시 홍문관 대제학, 의정부 우참찬, 예문관 제학, 호조판서,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좌참찬을 거쳐 홍문관 제학, 예문관 제학에 이어 사헌부 대사헌과 한성부판윤, 홍문관 제학, 공조판서, 동지사, 형조판서 등을 하고 다시 한성부판윤과 이조판서를 거쳐 공조판서, 홍문관제학을 겸하고, 공조판서, 형조판서, 이조판서, 지사를 하다가 공조판서, 지돈녕부사, 우참찬, 한성부판윤을 거쳐 이후 우의정이 되고 이후 좌의정을 하다 판부사가 되었는데 계속하여 우의정과 판중추부사를 다시 하고, 좌의정을 다시 하게 된다. 이후 판부사로 전직하며, 판중추부사로 있다가 다시 좌의정이 되고 이후 영의정이 되었다가 다시 좌의정으로 전직하였다. 이후 영의정으로 다시 임명되고, 잠깐 영사로 물러났다가 다시 영의정이 된다. 이후 행판중추부사로 물러났다가 이후 다시 영의정이 된다. 이후 다시 좌의정으로 전직되었다. 이후 판부사로 물러나, 판중추부사로 있다가, 다시 영의정이 되고, 도제조를 겸했다. 이후 판중추부사로 물러나고, 행판중추부사로 있다가 1719년에 별세한다. 그는 노론의 핵심인물로,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민진후, 민진원, 홍치중, 이유, 이여 등과 친했다.

가족 관계

고조부: 서성(徐渻), 증조부: 서경주(徐景霔), 조부: 서정리(徐貞履), 부: 서문상(徐文尙), 모: 이명한의 딸, 부인: 이훤의 딸, 장남:서명륜, 차남 :서명균

 

두산백과의 ‘서종태(徐宗泰)’

[徐宗泰, 1652-1719]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자는 군망(君望)이고, 호는 만정(晩靜)·서곡(瑞谷)·송애(松厓)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병조참의 문상(文尙)의 아들이다. 1675년(숙종 1)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8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였다. 이듬해 검열(檢閱)에 임명되었으며, 1682년(숙종 8)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가 되었고 독서당(讀書堂)에 뽑히어 사가독서를 하였다. 이후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수찬·헌납·집의 등 3사의 관직에 있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소론이 실각하고 남인이 득세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노론과 소론이 정권을 잡자 대사헌·대제학·이조판서·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훗날 그의 집안은 아들 서명균(徐命均)이 좌의정, 손자 서지수(徐志修)가 영의정을 지내 ‘3대 정승집’이라고 불렸다. 문집인 《만정당집》이 전한다.

 

* 서종태의 본관이 기록에 따라 대구(大丘) 또는 달성(達城)이라고 되어 있으나 계보(系譜)상 달성서씨 시조인 서진(徐晉)의 후손은 아니며 달성서씨(鄕派)의 한 갈래인 京派(대구서씨)로 엄밀히는 본관이 대구(大丘)이다. 그리고 위의 위키백과사전의 마지막 부분에 '훈구파 대신인 서거정의 후손이다'라고 기록한 것은 그릇된 것이고 서거정의 형 서거광(徐居廣)의 후손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종태(徐宗泰)’

1652(효종 3)∼1719(숙종 45).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노망(魯望), 호는 만정(晩靜)·서곡(瑞谷)·송애(松厓). 병조참의 서문상(徐文尙)의 아들이다.

1675년(숙종 1) 생원시에 장원, 1680년 문과별시에 급제하고, 이듬 해 검열이 되어 실록청도청(實錄廳都廳)·낭청(郎廳)으로서 『현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민씨(閔氏)가 폐위되자,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등과 소를 올리고 은퇴하여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다시 관직에 나와 승지·대사간·대제학·공조판서·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703년 정조사(正朝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거쳐 1716년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가 되었다. 저서로 『만정당집(晩靜堂集)』이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명균(徐命均, 1680-1745, 徐宗泰의 子)’

1680(숙종 6)∼1745(영조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평보(平甫), 호는 소고(嘯皐)·재간(在澗)·보졸재(保拙齋)·송현(松峴). 남원부사 서정리(徐貞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참의 서문상(徐文尙)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서종태(徐宗泰)이며, 어머니는 이헌(李藼)의 딸이다. 아버지로부터 아들 서지수(徐志修)까지 3대가 대신을 지냈으며, 부인 또한 3대가 대신을 지낸 김구(金構)의 딸이다.

1705년(숙종 31) 진사가 되고, 1710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으로 뽑혔다. 1721년(경종 1)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을 때,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禧嬪張氏)를 공격한 윤지술(尹志述)을 구하려다가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의 탄핵을 받고 안악군수에 좌천되었다.

1723년 진하부사(進賀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다음 해 경기관찰사, 1725년(영조 1)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727년 호조참판·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이조참판 등을 거쳐, 다음 해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1729년 호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형조판서·홍문관부제학이 되었고, 실록청도청당상(實錄廳都廳堂上)을 겸직하여 『경종실록(景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고 우참찬에 승진하였다.

1731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듬해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1734년 진주사(陳奏使), 1736년 세자책봉주청사(世子冊封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청렴하기로 이름 높았다. 글씨로는 경기도고양에 있는 「김주신묘표(金柱臣墓表)」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청선고(淸選考)』

 

* 서명균의 본관이 달성(達城)이라고 되어 있으나 계보(系譜)상 달성서씨 시조인 서진(徐晉)의 후손은 아니며 달성서씨(鄕派)의 한 갈래인 京派(대구서씨)로 엄밀히는 본관이 대구(大丘)이다.

 

한국인명사전/역대서화가사전 서명균[徐命均, 1680-1745, 徐宗泰의 子]

조선 중기~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평보(平甫), 호는 소고(嘯皐) · 재간(在澗) · 보졸재(保拙齋),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부친은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로서 3대에 걸쳐 정승을 지낸 명문 집안이다.

1705년 진사에 합격하고 171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으로 선발되었다. 1721년 헌납과 부수찬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을 때 경종의 생모 희빈장씨를 공격한 윤지술을 구하려다가 김일경 등의 상소로 안악군수로 좌천되었다. 1723년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발탁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후 다음해 경기도 관찰사로 보직을 받았으며, 1725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727년 호조참판 · 홍문관부제학 ·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해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호조판서가 되었다.

1730년 부제학에 재임되었고 실록청도청 당상을 겸직하여 『경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우참찬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판돈령부사와 1732년 우의정을 지내고 같은 해 좌의정에 올랐다. 1734년 진주사(陳奏使)와 1736년 세자책봉주청사(世子冊封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참고문헌

  • (肅宗實錄)
  • (景宗實錄) 
  • (英祖實錄)

 

 

3. 왕실족보(女系後孫)에 등재된 서씨

 

가. 왕실족보에 등재된 달성서씨 인물 검색 : 2,667명

 왕실달성1 (2).jpg

 

왕실달성2 (2).jpg

 

 

 

나. 왕실족보에 등재된 대구서씨 인물 검색 : 971명

 왕실대구1 (2).jpg

 

왕실대구2 (2).jpg

 

 

 

다. 왕실족보(장서각: 선원속보)에 등재된 영의정 ‘서종태(徐宗泰)’

서종태 (2).jpg

 

<원문 국역>왕실 집안의 女(사위) 서종태는 본관이 達城으로 영의정을 지냈고, 父는 승지를 지낸 서문상(文尙)이다. 첫째 아들(子)은 서명륜(命倫)이며, 둘째는 좌의정 서명균(命均)이고, 셋째 서명순(命純)은 文臣으로 판사(判事)에 올랐으며, 넷째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서명빈(命彬)이다.

  

부족하나마 그 동안 나름대로 조사한 근거와 장서각에 보유 중인 국가기록물 자료를 토대로 위와 같이 일부 내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자료들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시간이 나는대로 더욱 보강하고 상세히 정리하여 본 코너에 추가로 싣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참고가 되셨기를 바랍니다.
 
달성서씨 문중의 무궁한 발전과 더불어 모든 종원님들의 건강과 행복을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縣監公派 司果公門中, 23世, 一洙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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