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 왕건의 팔공산 전투와 대구 지명
대구의 지명들 중에서는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의 왕건의 최대 격전지 이였던 공산 전투로 인해 기인한 이름들이 많다. 당장 유명한 팔공산부터가 원래 이름이 공산이었던 것을 이 전투에서 고려군이 대패해 왕건의 여덟 장수가 죽었다고 해서 후일 바꾼 것이다. 아래는 공산 전투에서 유래한 지명 중 현재까지 남은 지명이다. 사실 이 이야기를 전부 믿기는 힘들어도 그만큼 공산 전투가 이 일대 지명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팔공산(八公山) :
동수회전의 배경이 된 공산에서 왕건의 신숭겸, 김낙 등 8명의 충성스러운 장수가 순절 하였기에 후일 팔공산이라 불렸다.
왕산(王山) :
지묘동 신숭겸 장군 사당인 표충사의 뒷산인데 적병에 포위되었던 왕건이 이 산으로 올라가서, 능선을 타고 세 번 만에 피신한 곳이다. 그래서 왕건이 죽을 것을 이 산 때문에 살았다 하여 왕산이라 했다고 한다.
일인석(一人石) :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왕산을 거쳐 피신한 곳이 동화사 뒤의 염불암이다. 여기 일인석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왕건이 거기 숨어 앉으니, 수도하던 도승이 첫눈에 왕건인 줄 알고, 그에게 “이 자리는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곳인데, 그대는 누구인가? 내려오라”고 했더니, “내가 바로 왕이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도승은 절을 하고 길은 안내해 주었다. 그 후 염불암 옆의 그 바위를 왕건이 혼자 앉아 있었다 하여 일인석이라 부른다고 한다.
독좌암(獨坐巖) :
"독지바우"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봉무동 노인회관 북쪽 5m 지점의 개천가에 있다. 이는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충신 명장을 잃고 왕산으로 달아나서, 팔공산의 염불암 옆 일인석에 앉아 있다가, 다시 파군재를 넘어 봉무동에 있는 바위에서 홀로 앉아 쉬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파군재(波軍재) : 불로동에서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리는 길목에 있는 재를 가리키는데, 신숭겸 장군의 군사가 1차로 견훤군에 패해서 흩어진 곳으로 알려진 파계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아랫 파군재라 하고, 2차로 패한 동화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윗 파군재라 한다. 파군재삼거리에는 크고 아름다운 신숭겸 장군의 동상이 있다.
해안(解顔) :
불로동 마을 앞을 해안이라 하는데, 동촌면이라 하기 이전에 해안면이라 했다. 이곳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 대패하고들판을 지나면서 몹시 걱정했는데, 마침내 무사히 통과하여 수심이 가시고 얼굴을 펼 수 있었다는 뜻에서 생긴 지명이라 한다.
반야월(半夜月) :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지금의 반야월에 이르니, 밤은 반야(한밤중)이고 달이 떠있었다고 해서 반야월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실왕리(失王里) :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면서 나무꾼으로부터 주먹밥을 얻어먹고 허기를 면했다. 나무꾼이 나무를 다 하고 돌아와 보니 사람은 간데없고, 그가 왕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왕을 잃었다고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와서 수치스러운 이름이라 하여‘시량’으로 고쳐 불렀다고 전하며, 변음되어 ‘시랭이’라 불리기도 한다.
미리사(美理寺) :
이 곳의 전투에서 신숭겸, 김낙 두 장수가 장렬히 전사했던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워 연등을 하고 두 장수의 명복을 빌었다고 전한다.
살내천 :
전탄(箭灘) : 고려와 백제의 군대가 개울 양쪽에서 서로 대치하여 격전을 치를 때 쏘는 화살이 쌓여 강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무태(無怠) :
1.왕건은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대구시 북구 서변동을 지나 연경동 방향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서변동 일대를 지날 때 왕건이 군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고 태만하지 말라.”라고 당부했다고 해서, 지금도 이 지방을 무태(無怠)라고 불렸다.
2.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혼자 군졸의 옷으로 변장하여 이곳을 지나는데, 들판의 농부들이 모두 부지런하고 태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연경(硏經) :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연경동 부근에 이르렀을 때, 선비들의 경을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와 감탄한 마을이라 하여 연경(硏經)이라 불려 진다고 한다.
나발고개 : 진군을 계속하면서 지금의 지묘동 고개에서, 진군의 나팔을 불었다고 하여 나발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견훤의 군사가 왕건의 군사를 둘러싸고, 쳐들어가며 나팔을 불었다고 해서 나발고개라고도 하고, 왕건의 군사를 깨뜨린 견훤 군이 이 고개를 넘으면서 나팔을 불었다고도 한다.
탑들 :
지금의 지묘동 앞들을 탑들이라고 하는데, 옛날 동수대전에 전사한 신숭겸장군의 원찰인 지묘사의 탑이 남아 있던 곳이라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지묘동(智妙洞) : 왕건을 위기에서 구한 신숭겸의 지혜가 오묘하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불로동(不老洞) :
1.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도망치다가 이곳에 이르자 어른들은 피난가고, 아이들만 남아 있어 붙여졌다.
2. 노인들은 피난가고 젊은이들만 남아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어쩐지 젊은이들은 다 전쟁터 끌려갔을 것 같고 애들만 남아있었다.
3. 왕건이 불로동 주민들에게 먹을 것을 대접받고는 이곳사람들 모두 늙지 않고 무병장수하길 기원한다고 덕담을 해서 유래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4.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도망치다 문득 뒤 돌아보니 체력이 떨어지는 늙은 병사들은 다 낙오하고 젊은 병사들만 겨우 따라오고 있다고 하여 불로동이란 얘기도 있다.
반월당(半月堂) :
1.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반야월과 안심을 지나 현재의 대구 중심 네거리인 반월당에 도착했을 때 달이 기울어 반달이 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반달이 떠 있을 때 이곳에 당도하였다 하여 반월당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 때 반월당이라는 백화점이 있었기 때문에 반월당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말도 있다. 반월당 백화점의 반월당도 공산 전투의 그 반월당에서 따왔을 것 같다.
隱蹟寺 :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이곳으로 은밀히 숨어들었다고 하여 은적사라 하였다.
안일사(安逸寺) :
대구 앞산에 있는 절인데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반월당을 거쳐 이곳 절에 이르렀는데, 이곳의 승려가 왕건을 극진히 대접하고 옷을 갈아입히는 등 편안하게 모셨다. 왕건을 비로소 이곳에서 안일을 맛보았다고 하여 후에 이 절을 안일사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왕굴 :
앞산 안일사 옆에 있는 동굴이다. 공산전투에서 패해 견훤에게 쫓긴 왕건이 3일 동안 숨어 지냈던 곳이다. 견훤의 군사가 왕건을 쫒다가 굴을 보니 입구에 거미줄이 쳐져있어 돌아갔다고 한다.
임휴사 臨休寺 :
임휴사라는 이름은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견훤에게 팔공산 전투에서 대패하였는데, 추격을 피하여 은적사에 숨어 있다가 안일사를 거쳐 이 절에서 쉬어갔으므로 그렇게 지어졌다고 한다.
<자료출처 : 해산 이승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