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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현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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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후 달성공원 동물원 이전 후에 달성의 공간 재배치를 하기 위해서 최근 대구시에서 우리 대종회에 달성서씨유허비를 세운 배경, 경위 및 목적 등을 포함하여 아래 6개항에 대한 의견을 제출해 달라는 공문을 보내와서

대종회에서 유허비 건립 당시의 대종회 서류를 열람한 결과 유허비 건립 비용에 관한 회계 서류는 있으나 유허비의 건립 배경, 경위 및 목적에 관한 서류는 없어서 과거 대종회의 단편적인 기록 및 증언과 구전과 고증문적 등을 참고하여 대종회에서 '달성서씨유허비를 세운 배경, 경위 및 목적' 등을 서술하여 대구시에 제출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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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공원 내 기념비(물)의 향후 조치에 관한 의견서】

 

1. 당시 달성서씨유허비를 설치한 배경, 경위 및 목적을 서술해 주십시오.

 

오종(吾宗)의 시조께서 고려 중엽에 달성을 터전삼은 이래 조선 세종 때 까지 옛 선조께서 세거(世居)한 곳이라 인하여 달성은 오종의 관향(貫鄕)입니다.

 

조선 세종 조에 이르러 구계 서침(龜溪 徐沉) 선생께서 달성에 계실 때 조정에서 달성을 나라의 요새로 쓰고자 비우게 하고 그 보상책을 논의하자 선생께서 보상을 사양하시면서 대구 고을 백성들이 관청에 바치는 환곡(還穀)의 이자를 한 섬에 다섯 되 씩을 줄여 주기를 청원하셨습니다. 세종께서 그 뜻을 가상(嘉尙)히 여기시어 특별히 대구부에 다섯 되 씩을 감하여 주시고 또 남산 옛 역참 터를 하사하시니 선생께서 그 곳으로 이거하시고 달성을 비우셨습니다. 이에 선생의 후손들은 불망달성(不忘達城)하여 마음에 달성을 성지(聖地)로 여겼습니다. 이후 읍민들이 선생의 은택에 감사하여 숭현사(현 구암서원)을 세워 선생을 제향 하였습니다. 이로써 오종의 시조 이래 누백년 세거지인 달성이 나라의 땅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고

 

이후 일제강점기 때 달성에 일본인들이 대구신사(神社)를 세울 때 달성서씨유허지(達城徐氏遺墟址) 표석을 훼손하여 망실되었습니다. 이에 선생의 박시제중(博施濟衆)을 현창(顯彰)하는 흔적이 사라져서 후손들이 통한(痛恨)의 강점기를 보내다가 광복 후 달성서씨 대종회에서 종족(宗族)의 총의로 달성에 선생의 덕행을 알리는 표석을 복원키로 하고 관청의 허락을 득하여 1971년에 현재 자리에 달성서씨유허비를 세워 표석을 복원하였습니다.

 

대구광역시에서도 그 후에 구계 서침 선생의 나라와 이웃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달성 중앙의 서침 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하여 선생의 덕행(德行)을 시민에게 알리고 있으며 또 선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정신이 깃든 달성을 ‘대구사랑 대구자랑’으로 선정하였습니다.

 

옛 글에 수구초심(首丘初心=근본을 잊지 않음)이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기조연구림 지어사고연(羈鳥戀舊林 池魚思故淵=조롱의 새는 옛 숲을 그리워하고, 연못의 물고기는 옛 못을 생각 하네)이라 하여 미물(微物)도 근본을 잊지 않음을 말하였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 추원보본(追遠報本)은 후손으로서 지극히 마땅한 것이라 이로써 달성서씨유허비를 설치한 배경, 경위 및 목적으로 삼습니다.

 

 

2. 현재 유허비에 대한 정기적인 관리와 현장에서의 행사 진행의 여부

    1) 유허비의 정기적인 관리

        (1) 유형적 관리 : 달성공원관리사무소

        (2) 무형적 관리 : 달성서씨 대종회

             - 달성서씨 대종회에서 정기적으로 유허비와 서침 나무를 살피고 있으며 또한 일족이 달성공원 심방 때 유허비와 서침 나무를 살피고 이상(異常)이 있으면 대종회에 알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2) 현장에서의 행사 진행의 여부

        - 일족 단체가 달성을 심방하여 화수회 및 정기총회 등을 개최하는 등 문중의 대소 행사가 유허비와 서침 나무 곁에서 수시로 진행됩니다.

 

 

3. 현재 유허비를 공원 내에서 다른 위치로 이전하는 것에 대한 동의 여부

    동의(×), 부동의(○), 연구용역의 결과에 따름(×)

    희망이전 위치(원칙적으로 이전에 동의하지 않으나 다만 필수불가결하게 현재 유허비 자리가 다른 용도로 필요하다면, 여타 기념비(물)들이 다른 곳으로 이전된다는 전제하에 희망이전 위치를 서술하겠습니다. 유허비를 건립할 당시에는 서침 나무가 지정되기 전이어서 현재 자리에 유허비를 세웠으나 지금은 서침 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고 유허비의 의미와 후면에 새겨진 글의 내용이 서침 나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서침 나무에서 가까운 현재 대한민국어린이헌장비 자리가 희망이전 위치입니다)

 

 

4. 현재 유허비를 달성공원 이외의 적절한 공원 혹은 관련 유적지로 이전하는 것에 대한 동의 여부

    동의(×), 부동의(○), 연구용역의 결과에 따름(×)

    희망이전 장소(없음)

 

    그곳이 달성이기 때문에

    그곳에 유허비가 있습니다.

    그곳에 유허비가 묻힐지언정

    그곳 외로 이전할 수 없습니다.

 

 

5. 현재의 위치에서 유허비의 어떠한 이전도 반대할 경우 그 이유를 서술해 주십시오.

    - 위 3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6. 기타 문의사항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서술해 주십시오.

    - 우리시와  ㈜무한자산이 수행중인「대구 달성」보존·활용을 위한 종합정비기본계획 수립 용역에 아래 사항을 제안하오니 반영하여 주실 것을 간곡히 청원합니다.

    1) 계획 수립 내용 중에 달성의 발굴이 포함되어 있다면 발굴에서 우리 옛 선조의 유물 및 세거지 유구(遺構) 등이 발견될 경우를 대비하여 발굴 전 과정에 오종(吾宗)의 참관이 꼭 필요함을 역설하오니 참관 구성원에 오종을 포함시켜 주실 것을 제안합니다.

    2) 이번에 달성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하니 계획에 서침(徐沉) 나무의 주인공인 구계 서침 선생의 박시제중 및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기리는 공간을 마련하고 선생의 선행을 시청각 자료화하여 자라나는 세대의 인성교육과 시민의 교화(敎化) 공간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합니다.

 

※ 참고 자료

- 대구 읍지의 달성 및 구계 서침에 관한 기록 사본 6매

- 달성서씨 유허비문

- 달성공원 서침 나무 입간판 사진 3매

- 달성토성을 ‘대구자랑 대구사랑’에 선정하였음을 알리는 입간판 사진 2매

 

상기와 같이 달성서씨유허비의 향후 조치에 관한 의견을 제출합니다.

2018년 11월 29일

 

달성서씨대종회 대표자 대종회장 徐 永 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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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읍지 표지(1768년경 간행)

[크기변환]대구읍지 표지 001.jpg

 

 

대구읍지의 인물조(하단에 서침 선생에 대한 기사가 있습니다)

[크기변환]대구읍지의 인물조 국역문 001.jpg

 

 

연결된 다음 페이지 입니다(상단) 바로 아래에 사가공(四佳公)에 관한 기사도 보이네요. 

[크기변환]대구읍지의 인물조 국역문 002.jpg

 

 

대구읍지의 달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크기변환]문대구읍지의 달성에 관한 국역 001.jpg

 

 

대구읍지의 달성에 관한 사본입니다(하단의 성지에 달성이 있습니다)

[크기변환]대구읍지의 달성에 관한 원문 001.jpg

 

 

대구읍지의 인물에 관한 사본입니다[상단 인물 본조 두 번째에 구계공(龜溪公)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조 3번째 인물에 정평공(貞平公) 기록도 있습니다. 부자(父子)가 함께 등재되었습니다.]

[크기변환]대구읍지의 인물조 원문 001.jpg

 

 

달성서씨유허비문

역사 얽힌 땅은 돌 한 덩이 나무 한 그루도 무심히 볼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는 막대를 멈추고 제 고장 사람들도 때때로 다시 돌려 보는 것이니 그것은 돌과 나무가 귀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귀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한 법이다. 여기 이 達城(달성)공원은 바로 그 역사 얽힌 곳이니 바라보라 전 玄風 琵瑟山(현풍 비슬산)이 동북으로 뻗어 最頂山(최정산)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大德山(대덕산)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 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圓山(원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또 북으로 떨어졌다 동으로 굽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고 일어나 동향하여 앉은 것이 바로 여긴데 앞에는 嶺南(영남)의 웅도 大邱(대구) 시가요 뒤에는 臥龍山(와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 쳤으며 멀리 동북에는 八公山(팔공산)이 솟아 둘리고 굽이도는 琴湖江(금호강)이 서으로 洛東江(낙동강)에 흘러들어 강산 풍경이 이와 같거늘 어찌 인물의 역사가 없을까보냐 達城(달성)은 본시 달구벌성이라 부르던 新羅(신라) 때의 고을 성이더니 뒷날 高麗(고려) 시대에 이르러 徐氏(서씨)의 터전이 되었었는데 徐氏(서씨)의 옛 기록을 상고하건대 일찌기 箕子(기자)의 자손으로 馬韓王(마한왕)이 되었고 후손들이 徐阿城(서아성) 곧 利川(이천)에 살면서 땅 이름을 따라 徐氏(서씨)가 되니 동쪽을 일컫는 우리 말새의 음역자요 新羅(신라)의 개국공신 阿城大將軍 徐豆羅(아성대장군 서두라)의 이름이 높이 들렸고 말엽에 阿干公 徐神逸(아간공 서신일)이 화살 맞은 사슴을 살려준 날 밤 꿈에 한 신인이 나타나서 그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서 공의 은혜를 입고 살아났으니 나도 공에게 그 은혜를 갚으리라 하며 공의 자손은 세세에 재상이 되리라 한 그대로 과연 八十(팔십)에 아들 弼(필)을 낳으니 高麗太師 內史令 貞敏公(고려태사 내사령 정민공)이요 손자 熙(희)는 契丹軍(거란군)이 침입했을 때 웅변으로 물리친 太保 內史令 利川伯 章威公(태보 내사령 이천백 장위공)이요 증손자 訥(눌)은 太保 內史令 門下侍中 平章事 元肅公(태보 내사령 문하시중 평장사 원숙공)으로 顯宗妃 元穆王后(현종비 원목왕후)의 아버지이며 그의 셋째 아들 維行(유행)이 達川君(달천군)의 봉작을 받은 것을 보아 利川(이천)에서 達城(달성)으로 관향이 나뉜 것은 이때부터 인듯하며 뒤에 奉翊大夫 版圖判書 晉(봉익대부 판도판서 진)에게 達城君(달성군)을 또 아들 奇俊(기준) 때에는 達川君(달천군)을 각각 봉했고 또 그의 아들 重大匡 金紫光祿大夫 門下侍中 贊成事 忠靖公 穎(중대광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찬성사 충정공 영)에게도 達城君(달성군)을 봉했으며 아들 鈞衡(균형)은 政堂文學 世子師傅(정당문학 세자사부)를 역임한 貞平公(정평공)이요 貞平公(정평공)의 아들 沉(침)은 字(자)가 聖黙(성묵)이요 호는 龜溪(구계)이며 鄭圃隱(정포은)의 문인으로 性理學(성리학)을 연구한 분이요 벼슬은 通政大夫 典醫少監 中樞院事(통정대부 전의소감 중추원사)를 지냈었고 世宗(세종)때 三南均田制處使(삼남균전제처사)가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達城(달성) 안을 군사상 요지로 쓰기 위하여 南山(남산) 옛 驛(역)터를 대신 주고 蓮信池(연신지)와 新池(신지)의 이권도 주며 대대로 벼슬과 녹을 주도록 명령했으나 공은 굳이 사양하며 한 집안이 사사로운 은혜를 받기 보다는 모든 백성이 은택을 두루 입게 하소서 하고 이 지방에서 바치는 還穀(환곡) 한 섬에 다섯 되씩 감해 줄 것을 청하여 위에서도 크게 칭찬 하시고 그대로 실시하여 오백여 년을 계속해 내려 왔으니 공의 은혜를 앙모함에 있어 어찌 저 顯宗(현종) 때에 龜巖書院 崇賢祠(구암서원 숭현사)를 세워 공과 공의 종족으로 이름난 이들을 제사해 왔던 것만으로 족할 것이랴 헤아려 보건대 徐氏(서씨)가 達城(달성)에 터를 잡았던 것이 高麗 靖宗(고려 정종) 시대라 九(구)백여년 전이요 또 이 터를 나리에 바친 것은 世宗(세종) 시대라 五(오)백여년인데 공의 뒤에도 徐氏(서씨) 문중에서 四佳(사가) 선생과 樂齋(낙재) 선생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명현달사들이 배출한 것은 진실로 덕을 끼친 때문이어니와 이같이 땅과 인물이 서로 얼리어 아름다운 역사를 지은 것이라 느꺼운 마음을 금치 못하여 노래 두어장을 지어 바친다.

箕子(기자)는 조국 殷(은)나라 폐허를 지나가며

바람결에 불리는 보리 이삭을 만지면서

麥秀歌(맥수가) 슬픈 노래를 눈물 섞어 부르더니

오늘은 徐氏(서씨) 자손들 達城(달성) 옛 터를 오르내리며

번영의 새나라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

조상의 어진 이야기를 자랑스레 뇌이네

一九七一년 三월 二二일

후학 李殷相 글을 짓고

후손 東均 삼가 써서

達城徐氏大宗會 삼가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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