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은 풍천(楓川) 및 영주동 두서(斗西) 달성서씨(達城徐氏)
영주 평은 풍천[시낼]과 두서[뒷새] 일대에는, 서한정(徐翰廷)의 후손으로 단산면 새내를 중심으로 세거하는 달성서씨 이외에 또 다른 계열의 달성서씨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해당 인물들의 묘갈명(墓碣銘)을 검토하면, 이들은 계보상으로 서신일(徐神逸)을 상조(上祖)로 삼고 있으나,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지냈던 서한(徐閑)의 후손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른바 경파(京派)인 대구서씨(大邱徐氏)와는 다르다. 또한 고려조에서 판도판서를 역임했던 서진(徐晋)을 원조(遠祖)로 삼는다는 면에서는 새내의 달성서씨와 같지만, 구계(龜溪) 서침(徐沉)의 후손들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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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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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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鈞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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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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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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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翊 大夫 版圖 判書 達城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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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奉郞 都官 佐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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進士(李穡 同年) 朝靖郞 尙食奉御 重大匡 達城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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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科 政堂 文學 諡號 貞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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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圃隱 門人 典醫少監 三南均田制處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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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興倉副丞 |
이들의 선대를 도시하면 위와 같다. 여기서 서기준(徐奇俊)의 아들인 서영(徐穎)은 과거에 합격하고, 중앙에 진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진사시 동년이었던 것을 계기로 모년까지 교분을 이어갔다. 그가 이색을 내방했던 어느 날, 이색은 시를 지어, 망년지우(忘年之友) 두 사람이 우정을 나눴던 39년의 추풍(秋風)을 회상하기도 하였다.
그와 이색의 이런 관계 덕택에 그의 아들 균형(鈞衡)은 과거 공부를 할 때에 자신이 지은 글을 가지고 이색에게 가서 질정을 구할 수 있었다. 이색은 공부 일과를 가지고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서균형에게 가르침을 주었는데, 이때 이색은 서영의 훌륭한 아들이 훗날 준마처럼 활보할 것이라 내다봤다. 균형은 어려서부터 풍채가 당당하고 키가 컸다고 한다. 스물 한 살의 나이였던 그는 정몽주가 장원을 차지했던 경자방(庚子榜)에 당당히 급제함으로써, 진사시에만 성취를 이루고 대과에서는 불리했던 그의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었다. 그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으며, 1380년(우왕6)에는 염흥방(廉興邦)・박형(朴形)과 함께 동당감시(東堂監試)의 주사(主司)가 되기도 하였다.
서균형의 아들인 서침(徐沉)은 정몽주의 문인이었다. 그가 정몽주의 문인이 되었던 것은 균형이 정몽주와 문과 동년이었던 데에 크게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 들어와, 세종이 달성에 성참(城塹)을 조성할 때에, 남산(南山)의 고역(古驛) 터 및 연신지(蓮信池) 등지를 그에게 내주는 대신, 달성에 있던 그의 땅을 받음으로써, 그 역사를 이루게 되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는 서침이 달성 일대에 막강한 영향력과 족세(族勢)를 구축해 왔음을 시사한다.
영주 시낼과 뒷새의 달성서씨는 이러한 계보를 가진다. 이들의 선조는 명실상부 대구부(大丘府)의 가장 강력했던 3대 이족(吏族) - 즉 서씨・배씨・백씨 - 가운데 하나였다. 달성서씨는 고려후기에 상경종사(上京從仕)함으로써 중앙의 고위 관인을 배출하는 한편, 향파(鄕派)도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바탕으로 재지사족과 이족으로 분화하였다고 한다.
시낼과 뒷새의 달성서씨는 모두 서침의 큰아들로 광흥창부승을 지냈던 서문한(徐文翰)의 후손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별도로 수록한 영주영풍향토지의 예를 쫓지 아니하고, 생몰년 순에 따라 그 인물들을 함께 수록하고, 여기서 그 입향 유래 등을 다루어 보기로 한다.
시낼에 세거하는 달성서씨의 영주 입향조는 서언신(徐彦信)이며, 좀 더 실질적인 입향조는 그의 아들인 서계상(徐繼祥)이다. 근세 영주 출신의 학자였던 장건덕(張建德)이 찬한 묘지명에 따르면, 언신은 임진왜란을 맞아 은둔에 들어가 가정에서 행실을 도타이 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온 집안 식구들과 함께 남하하였다고 한다. 이 집안은 처음 청송에 살 곳을 정하였다가, 다시 예천 선동(仙洞)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영주의 와석(臥石)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효암(曉庵) 이중철(李中轍)이 찬한 그의 아들 계상의 묘갈명에는, 계상이 통훈대부 군자감정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하지맹(城下之盟)이 이루어지고, 또 권간(權奸)들이 정국을 좌우하게 되자, 분연히 남하하였다고 한다. 그는 처음 청송에서 예천의 선동으로 옮겼다가 다시 영주의 와석으로 들어왔는데, 둔세(遁世)의 뜻을 깃들여 그 집을 선고(仙皐)라 하고 또 침석(枕石)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이 달성서씨의 영주 입향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이는 서언신보다는 그를 모시고 남하한 서계상 쪽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영주영풍향토지에 따르면, 이후 영주 남쪽 시낼에 본격적으로 터전을 연 이는 원천처사(元川處士) 서순경(徐舜卿)의 손자인 서만홍(徐萬弘)이다. 이 집안은, 모계(某溪) 김홍락(金鴻洛)이 서계상의 증손인 지산(芝山) 서승절(徐承節)의 묘갈명에서 이른 바와 같이, 구계(龜溪) 서침(徐沉)과 선고(仙皐) 서계상의 발자취를 이어 선업(先業)을 계승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집안은 밀와(密窩) 권석원(權錫元)에게 학문을 배웠던 문인들을 배출하는 한편, 서계상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침석정을 중건하는 일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가 하면, 영주동 뒷새는 구한말 의학으로 명성을 떨쳤던 귀운(龜雲) 서병효(徐丙孝)가 자리 잡은 곳이었다. 서병호는 유학적 가풍이 살아 있는 집안에서 성장하였으니, 영주영풍향토지에 따르면 그의 고조부인 서명열(徐明悅)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었다고 한다. 청년기의 그는 유가적 생활 방식을 익히고, 공령문과 사율(詞律)을 학습하였다. 그러나 그는 본초(本草)와 소문(素問)을 익히고, 상한법(傷寒法)을 깊이 연구하여 의학적 지식을 쌓았으며, 후에 이를 바탕으로 국왕 곁을 떠나지 않는 유망한 고위 의관(醫官)에까지 이르렀다.
그의 집안은 서수영(徐壽永) 대부터 안동(安東)의 수하동(水下洞)에 자리를 잡았으니, 그와는 11세의 차이가 난다. 그러다가 서병효는 동학혁명의 소요를 피하여 소백산 아래 대룡산(大龍山)으로 들어왔다. 그는 이곳에서 지암(止菴) 황영조(黃永祖) 등과 이웃지간이 되어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후 의관(醫官)의 신분으로 서울에서 생활해야 했으므로, 그는 궁궐 옆에 서울 집을 마련하고, 동남약국(潼南藥局)을 개설하였다. 그런데 이러던 와중에, 아들을 먼저 보내는 화를 당하게 되자, 뒷새에 집을 매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 임종(臨終)은 서울 집에서 함. -
황영조가 찬한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이때 그는 이 집의 정자를 “귀운(龜雲)”이라 하고, 헌(軒)을 “의두(倚斗)”라 하였으며, 경험고방요초(經驗古方要抄)라는 의서를 저술하였다고 하였다. 영주영풍향토지에 따르면, 귀운정은 명종(明宗) 때 이곳 출신의 명의(名醫)인 이석간(李碩幹)이 명나라 황태후(皇太后)의 병을 다스린 공으로 국가로부터 받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고 하였다.
시낼의 후손들이 구계 서침의 유업을 계승하고자 노력하였듯이, 황영조는 서병효에 대한 묘지명에서, 서침이 전의소감(典醫少監)을 지냈던 것에 주목하여, 서병효가 일종의 ‘가결(家訣)’을 세수(世守)했음을 말하였다. 결국 시낼과 뒷새의 달성서씨는, 정몽주의 문인으로서 백성들을 위해 사익(私益)을 기꺼이 던질 줄 알았던 구계를 추억하면서, 그가 체현한 가치를 계승하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고 하겠다.
서언신(徐彦信)
?~?
자 대유(大儒). 생원(生員) 윤(胤)의 아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추증됨.
공은 임진왜란을 당함에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감추어, 인륜(人倫)을 독실하게 실천하는 데에 힘을 썼으니, 부모를 정성껏 모시고 자제를 엄정하게 가르치며 종족들을 인애로써 대하였음.
1637년(인조15)에 공은 강화도의 변(變)을 듣고, 가족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청송(靑松), 양양(襄陽 : 예천의 옛 이름)을 거쳐 영주의 와석(臥石)으로 이거(移居)하였음. 현재 공의 후손들은 영주의 신천(新川)에 거주하고 있음.
청산(聽山) 장건덕(張建德)이 「義禁府都事徐公墓誌銘」을 찬하였음.
서계상(徐繼祥)
?~1677년(숙종3).
자 희중(禧仲). 호 선고(仙皐)・침석(枕石). 도사(都事) 언신(彦信)의 아들. 효릉참봉과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함. 어느 본에는 군자감정은 증직이라고 하기도 함.
공의 자질은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덕기(德器)가 크고 깊었다고 함. 공은 부모를 봉양할 때 정성을 다하여, 어버이의 눈병이 약을 쓰지 않아도 낫게 되니, 공의 효성이 감응된 바라 일렀다고 함. 가난한 친족과 궁한 친구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을 기뻐하여, 이로 인해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함.
공은 처음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고, 후에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에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곧 성하지맹(城下之盟)이 이루어지게 되자, 부친 언신을 모시고 분연히 남쪽으로 내려와 청송에 거주하게 되었음. 후에 다시 양양(襄陽 : 예천의 옛 이름)의 선동(仙洞)으로 옮겼다가, 다시 영주 와석(臥石)으로 들어왔음.
공은 와석으로 와서 그 집을 선고(仙皐)라 하고 또 침석(枕石)이라 명명하였으니, 이는 모두 둔세(遁世)의 뜻을 깃들인 것인데, 일찍이 지은 시에 이르기를 “좋은 때 술이 있어도 마실 수 없으니, 미궐봉 꼭대기에서 고향을 바라보네.[佳辰有酒不堪飮, 薇蕨峰頭望故鄕]”라고 하였음.
효암(曉庵) 이중철(李中轍)이 「通訓大夫軍資監正仙皐徐公墓碣銘」을 찬함.
서승절(徐承節)
1657년(효종8)~1747년(영조23)
자 경서(景瑞). 호 지산(芝山). 춘명(春明)의 아들. 선고(仙皐) 계상(繼祥)의 증손. 중추부사(中樞府事) 인립(仁立)의 손자. 공은 노직(老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받았음.
모계(某溪) 김홍락(金鴻洛)이 「嘉善大夫行龍驤衛副護軍徐公墓碣銘」을 찬하였는데, 명(銘)에서 공이 구계(龜溪) 서침(徐沉)과 선고(仙皐) 서계상(徐繼祥)의 발자취를 이어서 선업(先業)을 잘 계승하였음을 언급함.
서순경(徐舜卿)
1767년(영조43)~1829년(순조29).
자 정보(鼎輔). 자남(自南)의 아들. 지산(芝山) 승절(承節)의 손자.
공은 어려서부터 몸가짐이 준수하고 언동이 조용하였음. 취학하였을 때에는 비루하고 태만한 습관을 짓지 않고, 오직 효우(孝友)와 충신(忠信)을 일생토록 지키고자 하였음. 살던 골짜기가 그윽하고 정취가 있었는데, 공은 옛 은자의 처신을 고수하면서 어초(漁樵)로써 즐거움을 삼았음.
청산(聽山) 장건덕(張建德)이 「處士徐公墓碣銘」을 찬하였음.
서정덕(徐廷德)
1843년(헌종9)~1917년.
자 치일(致一). 호 계은(溪隱). 선고(仙皐) 계상(繼祥) 후손. 만홍(萬弘)의 증손. 병길(丙吉)의 아들. 밀와(密窩) 권석원(權錫元)의 문인.
신천리(新川里) 태생.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권석원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학문하는 요체를 들었다고 함. 공은 행실에 있어서는 효제(孝悌)를 우선하였고, 몸가짐에 있어서는 충신(忠信)을 근본으로 삼았음.
공은 매우 가난하여 주경야독의 생활의 불가피하였으나, 안으로는 근검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문행(文行)으로 사람들과 교유하여, 마침내 문호(門戶)를 세우기에 이르렀다고 함. 또한 여러 자제(子弟)와 자질(子姪)들이 힘들게 들에서 농사짓는 광경을 보고, 농번기에는 절대로 회음(會飮)하지 않았음.
공은 당숙인 우잠(愚岑) 서병문(徐丙玟), 동계(東溪) 서병묵(徐丙黙)과 더불어 한 집안의 지기(知己)가 친밀히 교유하였는데, 그 사귐이 자손들의 모범이 되었음. 공은 침석정(枕石亭)을 중창하는 데에 진력하여, 마침내 성취를 보았음.
공이 임종하던 날에 자손들이 호읍(號泣)하며 어찌할 줄을 몰라 하자, 공은 “울지 말거라. 늙어서 죽는 것은 이치이다. 내가 일생 패복(佩服)한 것은 ‘겸손할 겸(謙)’ 한 글자이다. 너희들은 사람들을 만나 말하고 인사할 때 반드시 공겸(恭謙)하라. 이것이 내 바람이다.”라고 유훈(遺訓)을 남겼음.
해창(海窓) 송기식(宋基植)이 「溪隱徐公遺事」를 찬하였음.
서병묵(徐丙默)
1846년(헌종12)~1924년.
자 순여(舜予). 호 동계(東溪). 진동(震東)의 아들. 선고(仙皐) 계상(繼祥)의 10세손. 밀와(密窩) 권석원(權錫元)의 문인.
공은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는데, 권석원의 문하에 나아가 배우면서부터, 학문하는 방도를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고 함. 겸하여 과거 공부도 하였는데, 여러 차례 합격하지 못하였어도, 이 때문에 우울해 하지 않았으며, 어버이 상을 당하고부터는 완전히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음.
이로부터 서사(書史)로 자오(自娛)하였으며, 후진들을 계몽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로 삼았음. 공은 특히 종형(從兄)인 병국(丙國)・병민(丙玟), 종질(從姪)인 정익(廷翊)과 더불어 한 집안의 뜻이 맞는 지기(知己)가 되어 의기투합하였음. 공은 선대의 재사(齋舍)를 창건하고, 선조 계상의 침석정(枕石亭)을 중창하는 등 위선 사업에도 적극 주간하였음.
국권이 일제에 피탈된 후에는 두문불출하며 책을 저술하는 일로 자오(自娛)하면서, 「벽산론(碧山論)」, 「미산기(薇山記)」 등에 자신의 뜻을 깃들임. 공의 공부의 주안점은 육경(六經)을 철안(鐵案)으로 삼고 오륜(五倫)을 독실하게 실천하는 것이었으므로, 문사(文詞)에 치우치지 아니 하였으나, 그 문장과 시(詩)는 충담(沖澹)하고 연숙(鍊熟)하여, 조탁을 일삼지 않고 이순(理順)하였음. 공이 돌아감에 사림(士林)들이 회장(會葬)하였음.
유집이 있음. 해창(海窓) 송기식(宋基植)이 「東溪徐公行狀」을 찬함.
서병효(徐丙孝)
1858년(철종9)~1939년.
자 중명(重明). 호 귀운(龜雲)・백남(白南).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규장각대제학(奎章閣大提學) 상도(相道)의 아들.
안동 수하동(水下洞)에서 출생함. 공은 동학(東學)의 소요를 피하여 안동에서 영주 안정 대룡산(大龍山)으로 이거하고, 자신의 호를 ‘백남(白南)’이라 명명하였음.
공은 어려서 자질이 온아하고 총명하였으며, 효제(孝悌)에 독실하고 남들과 더불어 교제를 잘하였다고 함. 또한 늘 대체(大體)를 견지하고 소절(小節)에 얽매이지 않았음. 공령문을 익혔으나 이로써 남들에게 실력을 뽐내지 않았고, 시문(詩文)과 격률(格律)을 자못 즐겼으나 성벽(性癖)에 이르도록 하지는 않았음.
공은 옛 사람의 책을 읽고, 옛 사람의 도리를 즐겨서, 온량(溫良)・공검(恭儉)의 덕목을 잘 지키고, 박문약례(博文約禮)하니, 세인(世人)들이 “금지고인(今之古人 : 현재를 살면서도 옛 전범을 잘 지켜 고인의 풍모가 있는 사람)”이라 일컬었다고 함.
공은 의술(醫術)에 조예가 깊었으니, 어릴 적부터 본초(本草)와 소문(素問)에 방통하여, 이를 통해 스스로 인술을 펼치리라 기약하였음. 특히 공은 사람의 질병이 상한(傷寒)에서 기인한다는 점에 근거하여, 동한(東漢) 때 장기(張機)가 체계를 잡은 상한(傷寒) 치료법을 더욱 부지런히 연구하여 이 방면에 뛰어난 역량을 축적하였음. 공은 후에 이러한 의학적 역량을 바탕으로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고위 의관(醫官)으로 활약하였음.
처음 공은 1901년(광무5) 12월에 상공학교 교관에 임명되었음. 1905년(광무9)에는 덕릉(德陵) 등의 비각을 영건(營建)하고 표석(表石)을 세우는 일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6품에서 정3품으로 승진하였음. 1907년(융희1) 양력 11월에는 시종원전의장(侍從院典醫長)에 임명됨.
국권 피탈 후에도, 공은 소산선(小山善)・김형배(金瀅培)·홍철보(洪哲普) 등과 함께 이왕직(李王職) 전의(典醫)에 임용됨과 아울러, 고등관 4등에 서임되었음. 1911년 2월에는 김기웅(金基雄)과 함께 한성의학강습소(漢城醫學講習所)를 열어 생도들에게 서양 의학과 전통 의학을 가르치기도 함. 1916년에는 이왕직 장시사(掌侍司)에서 근무하게 되었으며, 1919년에는 뇌일혈(腦溢血)과 풍증(風症)으로 위독하던 고종(高宗)의 치료를 위해 창덕궁(昌德宮)으로부터 와서 한약을 지어드리기도 하였음.
공은 이왕직 고위 의관으로서 순종의 건강 유지를 위해 진력을 다하였음. 1915년 6월에는 고등관 3등에 서임되었으며, 1917년 6월에 순종이 도쿄로 갈 때 윤택영(尹澤榮) 등과 더불어 국왕을 배종하였음. 순종실록부록(純宗實錄附錄)에는 공이 순종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치료하기 위해 입진(入診)한 기사가 산견(散見)되며, 1924년과 1925년에는 순종의 환후 치료에 근로한 공로로 상금을 지급받기도 하였음. 공은 마침내 1925년 3월에 퇴직 명령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나, 당분간 계속적으로 순종의 진찰을 맡았으며, 그 공로로 상금을 받기까지 하였음. 이 시기에 공이 순종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충정을 다하여 의관직에 진력한 정황은영주영풍향토지(榮州榮豊鄕土誌)에 상술되어 있음.
공은 별곤건(別乾坤) 제65호(1933년)에 실린 ‘다수당(多鬚黨) 수령(鬚領) 모박사(毛博士)’의 「털보철학(哲學), 인물철학(人物哲學) 제2강」 중 ‘근래(近來)의 다수당(多鬚黨)’ 부분에 언급되었는데, “대복피(大腹皮) 선생의 아호를 가진 동아의학연구회(東亞醫學硏究會) 김성기(金性璂)씨도 수염만으로도 그 회의 회장이 될 만하고, 동남약국(潼南藥局) 서병효(徐丙孝)씨도 총무자격이 상당하다.”라고 하였음. 그만큼 당시 동남약국을 운영하던 공은 기르고 있던 수염이 수려하고, 의사로서의 명망이 있었던 것으로 보임.
공의 의학 저서인 경험고방요초(經驗古方要抄)가 연활자로 간행되었고, 유고가 있음. 지암(止菴) 황영조(黃永祖)가 「嘉善大夫行典醫長徐公墓誌銘」을 찬하였음.
서병문(徐丙玟)
1869년(고종6)~1916년.
자 문옥(文玉). 호 만롱(晩聾)・우잠(愚岑). 수동(守東)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중태(重泰)의 증손. 밀와(密窩) 권석원(權錫元)의 문인.
공은 어려서부터 의표(儀表)가 장대하고 훌륭하였으며, 총명함이 남달랐다고 함. 9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집례(執禮)를 성인(成人)과 같이 해냈다고 하며, 어머니를 섬김에 그 정성과 효성을 다하였다고 함. 계부(季父)에게 글을 배울 때에, 일일이 독려하지 않아도 스스로 노력할 줄을 알았음. 후에 어머니의 명으로 권석원에게 청업(請業)함.
공은 특히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남달랐음. 몇 달째 병으로 위중하던 어머니가 별어(鼈魚)를 잡수시고 싶어 하였으나, 겨울철이라 사방에서 이를 구해도 얻을 수 없었는데, 하루는 공이 한 큰 자라가 용추(龍湫)에서 노는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 나가 보니, 과연 꿈과 같이 자라가 있어서 이를 잡아다가 어머니께 드렸더니, 병이 곧 치유되었다고 함. 후에 어머니의 숙환이 다시 발작하자, 공은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드려서 거의 끊어졌던 목숨을 소생시키기도 하였음. 간간히 제중신편(濟衆新篇)을 읽으면서, 자제들이 시약(侍藥)할 때 부모님의 병환에 따른 약방을 스스로 처방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함.
공은 살던 곳 옆에 몇 칸 규모로 선대의 침석정(枕石亭)을 새로 일으켜, 조상을 존경하는 마음을 깃들였음. 공은 1900년(광무4)에 시종원(侍從院) 분어사(分侍御)로 임명되고, 1902년 9월에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되었으며, 1905년 6월에는 6품관에서 정3품관으로 승급되었음.
모계(某溪) 김홍락(金鴻洛)이 「通政大夫中樞院議官徐公墓碣銘」을 찬함.
서정효(徐廷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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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성순(聖純). 호 묵재(黙齋). 만롱(晩聾) 병민(丙玟)의 아들. 공은 1903년(광무7) 3월에 윤동희(尹東曦)·함낙영(咸駱榮)・김태경(金泰慶) 등과 함께 통신사(通信司) 전화과(電話課) 주사(主事)에 임용되었다가, 그 다음날 의원면직함.
서정린(徐廷麟)
1876년(고종13)~1911년.
자 중집(中執). 호 희당(熙堂). 귀운(龜雲) 병효(丙孝)의 아들.
처음 공은 1896년(건양1) 3월에 의릉참봉에 임명되었음. 그러다 1901년(광무5) 7월에 황해도관찰부(黃海道觀察府) 주사(主事)로 임용되었으며, 같은 해 8월에 의원면직되었음. 1905년(광무9) 5월에 6품관으로 올랐고, 1907년(광무11) 3월에는 순흥군(順興郡) 주사(主事)로, 1910년(융희4)에는 순흥군(順興郡) 서기(書記)로 임용되었음.
한일합방이 되자, 공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병이 들어 돌아가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의롭게 여겼다고 함.
서정학(徐廷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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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운(龜雲) 병효(丙孝)의 아들. 희당(熙堂) 정린(廷麟)의 동생. 공은 1906년(광무10) 4월에 주전원(主殿院) 전무과(電務課) 주사에 임용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