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송화부사 달성서공 휘 습 사적>
公(공)의 휘(諱)는 漝(습)이시다. 우리 달성서씨의 상조(上祖)이신 고려조(高麗朝)의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達城君(달성군) 휘(諱) 진(晉)이 공(公)의 고조이시며,증조는 도관좌랑(都官佐郞)에 추봉문하시중찬성사(追封門下侍中贊成事) 달천군(達川君) 휘(諱) 기준(奇俊)이시고,중대광금자광록대부(重大匡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찬성사(門下侍中贊成事)에 시호(諡號)는 충정공(忠靖公)이며,달성군(達城君)으로 봉작(奉爵)된 휘(諱) 영(穎)이 할아버지시고,아버지의 휘(諱)는 균형(鈞衡)이신데 자(字)가 상경(商卿)이시고 호(號)는 학암(學巖)이신데,난계(蘭溪) 김득배(金得培)선생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여 공민왕(恭愍王) 경자년에 문과에 등재하였으니 정포은(鄭圃隱),이석탄(李石灘) 제현(諸賢)들과 함께 과거에 급제한 도덕과 의리로 사귀든 벗이었다. 공민왕 병오년에 사간원(司諫院)의 사간으로 재직시에는 나라를 망하게하는 요망스런 중인 신돈을 죽이라는 상소(上疏)를 올렸으나 때가 맞지 않았고 뜻이 같은 동지가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도의(道義)의 곧은 절개(節介)는 조정(朝廷)과 온나라에 이름을 떨치었다. 직제학(直提學) 정당문학(政堂文學) 이부상서(吏部尙書) 양광도관찰사(楊廣道觀察使) 순충론도좌명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 상의문하찬성사(商議門下贊成事)에 세자사부(世子師傅)를 두루 역임하시다가 공양왕(恭讓王) 신미년에 천수(天壽)를 마치시니 바르고 곧고 메마르지 않음이 정(貞)이요,마음이 깨끗하고 욕심이 없으며 올바른 행실이 평(平)이라 하여 정평공(貞平公)이라 증시(贈諡)하였으며,순조(純祖) 계사년에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봉향(奉享)하였다. 어머니는 광산군부인(光山郡夫人) 김씨이며 전의부령(典議副令) 영리(英利)의 따님이시다. 공(公)의 형님이신 휘(諱) 침(沈)은 자(字)가 성묵(聖默)이시고,호(號)는 귀계(龜溪)이신데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선생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전심(專心)하여 세종조에서 조봉대부(朝奉大夫) 전의소감(典醫少監)을 역임하시고 학식과 덕망으로 발탁되어 삼남균전제처사(三南均田制處使)였는데 살고 계시던 달성터의 지형이 천연적으로 좋은 성루(城壘)가 되므로 임금이 명하여 남산역터(南山驛基)와 바꾸라하며 세록(世祿)을 더주려 하신대 사양하며 받지 않으시고 부민(府民)의 상환곡(償還穀) 이식(利息)을 한섬머리에 닷되씩을 감하기를 간청하여 부민이 은혜를 입었으니 후세의 선비들이 은덕을 느끼면서 귀암서원(龜巖書院)에 봉향하였다.
아우의 휘(諱)는 환(渙)이며 낭장(郎將)이였다. 공(公)은 세종조에 문과로 등제하여 송화부사(松禾府使)를 배수(拜受)하고 임지향민(任地鄕民)에게 어질고 아름다운 풍속을 가르치며 착한 정치로 백성을 다스리다가 세종이 승하(昇遐)한 후에 관인(官印)을 풀어놓고 의령(宜寧)으로 내려와서 운림(雲林)과 천석(泉石)에 소요(逍遙)하심을 즐기며 후진강학(後進講學)을 즐기시다가 수명을 마치셨는데 후사(後嗣)가 없어 백형(伯兄) 귀계공의 셋째 아드님인 휘(諱) 문덕(文德)으로 뒤를 이었다. 묘(墓)는 의령읍 만천리 진영산합곡 자좌원이다. 공(公)의 사적은 의령 고성지지(固城地誌)에 기록이 전래되고 있으나,세대가 아득하고 문헌으로 전함이 없어 공(公)의 생졸년대와 행적을 고증할 수 없으니 후손들의 울한(蔚恨)이라. 배위는 淑夫人(숙주인) 연안김씨이며 領相(영상) 孝誠(효성)의 따님이시다. 후사(後嗣)한 휘(諱) 문덕(文德)의 자(字)는 예일이고 호(號)는 무우당(無憂堂)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만경현감(萬頃縣監)과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역임하였는데 의령 고성양지(固城兩誌)에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묘(墓)는 의령 만천리 하촌 진영산 제일위신좌원이며 공(公)의 장손인 휘(諱) 석련(錫蓮)은 성균관 진사요,차손인 휘(諱) 석명(錫蓂)은 성균관 생원이요,계손 휘(諱) 석령(錫苓)은 성균관 진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