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 고려 중대광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찬성사 달성군 충정공 노남선생 휘 영 사적>
先生(선생)의 諱는 穎(영)이요. 호는 櫓南(노남)이라, 대대로 達城(달성)에 살았으니 達城은 실로 先生의 食邑(식읍)으로 물려 받은 世傳之鄕(세전지향)이다. 先生께서 麗朝(려조)에 벼슬을 하여, 恭愍王(공민왕)(1360) 庚子에 朝請郞(조청랑)으로 尙衣奉御(상의봉어)를 거쳐 여러번 승진되어 重大匡(중대광) 金紫光祿大夫(금자광록대부) 門下侍中 贊成事(찬성사)에 이르렀으며 達城君에 封해졌는데 시(諡)는 忠靖(충정)이시다. 일찍이 弘文館(홍문관)에 있으면서 나라에 유용한 많은 인재를 기르고 오랫동안 文衡(문형)을 잡더니 文章訓業(문장훈업)이 세상에 떨쳤다. 配(배)는 益陽郡夫人(익양군부인) 李氏로 丞同正(승동정) 景安公(경안공) 諱(휘) 永儒(영유)의 따님이다. 아들 鈞衡(균형)을 두었으니 호를 鶴岩(학암)이며 政堂文學(정당문학)으로 시호는 貞平(정평)이시다.
※ (海東名賢錄) "徐 穎(영)은 호를 櫓南(노남)이라 하며 달성인이요, 벼슬은 중대광 문하시중 찬성사 달성군이며 文苑(문원)에 있으면서 인재를 勸奬(권장)하여 나아가게 하였고 문장과 훈업으로 세상에서 존중 받았다."
※ (麗朝名臣錄) "徐 穎은 벼슬이 문하시중 찬성사 달성군이며 文衡(문형)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