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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서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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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첩은 대제학 보만재 휘 명응조께서 선대에 부터준비해온(발문에보면 보첩을 선고때부터준비해와서나 간행못보고 자신의 대에와서 간행한다는내용이나옴) 보첩을 간행하면서 그범례를 적은것인데,  실질적 보첩의 형태를 갖춘것입니다

 (양문의 실질적 보첩의 근간을이룹니다)

 

임오보이후 판도공후손을 더 증보못한사유가있고 이후 무인년(1818년)에도간략히

나옵니다

 

하나,서씨는 본관이 달성인데 달성(현 달성공원)은 대구에속한 까닭으로 이제 여지승람에

         알려진바 대구연역과 달성형승으로서 편 첫머리에 기재한다

하나,임오년과 병진년수보때는 본종과 지파가 번거롭지않아  보책이매우 간략한 까닭에

       외손을 기재함에 있어서 간혹 5대,6대에 이르렀어나 오늘날은 오직 후손이 번성할분

       아니라 편질이 호대하고 또한 불가불 내외의 분별도 조금 두어야 하는 까닭에 다만

       외손에 한하여 기재하고 기타의 규모는서로 모든집을 참고하여 구보를 보충하였다

하나,서씨는 모두 7관이 있는바 이천의 보첩은 신라 아간 서신일에서 기원하고

        장성은 서능 , 부여는 서수손, 연산은 서보, 남평은 서린, 평당은 서준방,에 기원하니

        대구와 아울러 7관이 되므로 세상에서는 서씨의 관(貫)이 동일하지 않으나 서신일로서

       시조를 삼는다고 일컫는다

       의성김씨 보첩에서는  서씨의 선조는 기자로부터 나와 신라말에 서신일이 있고  여초에

        서목이 있으니 이천의 서씨는 모두  그 후손이나 대구, 봉성도 이천으로부터 나누었는바

        모두 이에 (신일의 후손이다)라고 하였다

       세대가 이미 멀고 문헌도 남아있는것이 없어 전문(傳聞)한 것을 근거하여 안심하는것도 옳지

       못한 까닭에 모두 아울러 대략기록 하였다

 

       오직 대구의 서씨는 하나는 판도공파가 되고 하나는 소윤공파가 되었어도 성과 관이 같고

       거소는 부읍을 함께 하였으니 일원에서 나온것을 의심할바 없는것이다

       그러나 판도공파는 이미 족보가 있으므로 이제 임오보에 기록된바요 구본(병진보1736년)

        에서도 증원함이 없이 임편에 실려있으니 그 대략을 볼수있는것이다

 

하나, 소윤공 이하로는 모두 한두파가 서로 전하여 왔으나 충숙공에 이르러 사대부의 아들이

        일어나니 파벌이 더욱 번성하였던까닭에  이제 소윤공으로 부터 충숙공에 이르기까지

         무릇 14세를 갑편으로 하였고, 만사공파를 을편, 전첨공파를 병편, 첨추공파를 정편,

         도위공파를 무편, 봉사공파를 기편, 서흥파를 경편, 사가공파를 신편, 판도공파는 임편,

         으로 하였고, 갑편에 기록한바 14세이상으로 나타난 묘지와 구암서원묘정비문은 묘산기

         와 각자도를 붙여 계편으로 하였으니 모두 합하여 10편이 되는지라 10간의 수에 하는바

         뒤에 이를 이어서 보편을  증수하는사람은 갑편은 손댈바 없을것이며, 을편이하는 마당히

          모편의1, 모편의2 ,모편의3,이라고하여 나가면 후편을 계속하여 펴낼지라도 앞은 움직이지

         아니할것이므로 무궁하게 이을지라도 거의 여러번 간행하는 노고를 덜수있을것이다

하나,보(譜)는 종법을 말하는바이니 종법을 5세로소 친함이 다한즉 증조의 손으로 이어 종을 삼는

       까닭에 보의 도면을 옆으로 다섯칸으로 나누어서 등5계에는 단지몇세라고마만쓰고 방주는

       쓰지 아니하고 모판을 보라 마땅히 후편제1계를 보아야 할것이다

        이것은 친함이 다하였는까닭으로 별종이 된것이요 이에 방주는 갖추어 쓰고 다시 그 우측에

        고증조이하의 휘를 방서하여 각각등착을 두어서 그파의 소종래를 밝혔다

        이것또한 종법이 그사이에 들어 있는 것이다

        소윤공이하 5세는 보질이 전해 오지 않으므로  여섯칸을 그려서 그다섰칸을 비워 두었어니

        타일에 적묘의 비지가 나타나 기록 될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사세가 어찌할수 없기때문이다

하나,갑편은 연대가 오래됬으므로 사실을 징신하는데 힘썼다 그래서 모든집의 시문과 비지

        가운데 고찰 증거할만한것이 있으면 견요하거나 산만한것을 가리지 아니하고  아울러 수록

        하였다 이것은 전대의 문적을 상고하지아니하며 보계를 지나쳐 버렸다는 책임이 있는

        까닭이다

하나, 방주는 구보에 의하여 자, 호, 과제, 과력, 생졸,향년,묘지,비표를 갖추어 썼으나 특별이

        호는 다만 세인이 공지하는 것만 기록하고 향년은 남자를 70이상 배위는 80이상만을 수로

         썼다  관력은 삼공을 관지라 하였으며 문은 시종이상 무는 병사 수사이상 음은 판결사이상

          을 관지(官止)라 하였고 그나머지는 관이라고 말하 였다

하나,선대에는 비록 낭장의 품계라도 모두 기재 하였지만 자손은 오직 통정이상의 품계만을 기재

         하였으며 살아 있는 사람은 비록 대광 숭정(정1품)이라 하더라도 또한 기재 하지 않았으

        니 이것은  옛날은  상세하게하고 오늘의 것은 간략히 하려는 까닭이다

하나,삼공(삼정승)의 경연 춘추나 옥당(홍문관)의 사독 검서관처럼 모든 이러한 유와 같은 겸직은

        다만 본직만을 들어내면 자연히 유추할수있을것이므로 모두 생략하였다 그 외의

        특별한 겸대가 있어면 일일히 갖추어써서 후고를 삼케하였다

하나,보는 비(碑)와 같이 아니하나니 평생의 언행을 비록 상세하게 들어낼필요는  없다할지라도

      간혹 유문(퇴계같은  큰학자밑에서)에서 수업하였거나 지행품수하여 은둔하여 빛나지 못한이는

       모두 삼가 기록 하였다 이것은  숨은것을 들어내 주고 깊은것을 밝혀주는 의리이다

하나,호는 그 절차하는것인바 평일의 언행을 크게 알수있는것이므로 항상 호법을 의논하여

        훈설하는 바이다 모두 기재 하였다

하나, 배위는 증조이하와 외조를 모두 갖추어 썼으나 년대가 오래되어 징신할바가 없으면

        다만 아는 사람의 생졸과 묘만을 기록 하였으니 이에 짐작 할것이요 만일 전후의 배가

        있으면 각각 그위 아래에 둔바의 자녀수를 기록하였다

하나,본종은 남자는 앞으로 하고 여자는 뒤로 하였으나여자의 아래에 차례를 적어서  그행렬을

        식별하게 하였다   남여가 없어면 무후라고 남자가없어도 여자가있어면 무남이라고

        하였으며 만약에 뒤를 이을 아들을 두었으면 계자(繼子)라고하지아니하고 그냥 그아래에

        본생친을 기재하고 또한 소생친아래에도 생계하되 모친모후가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하나,사위는 다만 성관과 부명및 관력만을 기재하였으나 선대에 달관이나 명인이 있으면

        또한 기록하였다  재실이면 전후로서 구별하였고 삼실이면 초중으로 구별하여 소출로 하여금

       서로 섞이는 폐단이 없게 하였다

하나,외손은 아들을 앞으로하고  딸을 뒤로하는 예를 쓰지않았다  후자도 바로 계자라고 하였으며

      첩도 모관 모의 여라고만 써서 그 성관등을 생약하였으니 이것은 내외종에 분별을 두어 그 예

      를 달리하려는 까닭이다

하나, 서자는 모두  적(적실소생)녀의 아래에다 쓰고 방주도 구보에 의거하여 간략하게 등표를

        두었다 그 적통을 있는 사람이 있으(사가공의 자 휘 복경)면 적 녀의 위에 적고 또한

       자(字)도 기록하였다

하나,이성의 관이 혹 읍명이거나 읍호이거나 하면 모두 세상에서 통칭되고 알기 쉬운 것으로 하였다

       마치 삭녕의 최씨는 삭녕으로 나주의 박씨는 반남이라 쓴것이다

하나, 모든 간지는 숭정이전에는 황명의 연호를 쓰고 그이후에는 열조의 역년으로 표식하여

       세대의 상하와 시기의 선후를 서로 겹치는 근심을 없게 하였으며 오래되지 아니하여 쉽게

       미루어 알수 있는 것은 다만 간지만을 거유하여 가급적생략하려고 하였다

 

 

 

 

 

 

 

첨부:무인년(1818년)중간 대구서씨 범례   편찬자 영의정 휘 매수조  도위공파

 

 다섯째, 판도공파는 이미 따로 보(譜)를 만들었으며 그로인하여 본파에 제출하였던 보단(譜單)

            도 떼어  갔으니 다만 머리 2판만 남아 있으므로  그 대략을 알수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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