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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현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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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玉溪書院(옥계서원) 奉安文(봉안문)                              

                                                                                   通判(통판) 徐有矯(서유교)

 

뿌리가 굳고 가지가 무성하도다. 源源(원원)이 멀고 흐름이 길도다. 대대로 빛나고 珪瑞(규서)가 차례로 이었으니 아름답다. 선생이여 山川(산천)이 祥瑞(상서)를 길렀고 文苑(문원)에 盟主(맹주)가 되어 큰 旗(기)에 業積(업적)을 수 놓았고 群材(군재)를 勸奬(권장)하여 發育(발육)하였으며 門(문)과 담장에는 桃李(도이)가 무성하고 이에 후손을 啓導(계도)하였으며 뜰에 짙은 그늘이 꽃다운 香氣(향기)를 發散(발산)하였고 龜溪(구계)의 아름다운 德(덕)과 鶴巖(학암)의 忠良(충량)은 예에 그 근본을 찾았으니 진실로 살펴보건데 가히 잊어버리겠는가. 麗末(려말)이 멀어 국사가 散亡(산망)되고 故家(고가)가 零替(영체)해서 세록을 收藏(수장)하지 못하였으므로 처음은 어두웠다가 마침내 들나게 되었다. 더 더욱 오래 될 수록 빛나나니 輿論(여론)이 끌 뜻 하는지라. 하물며 이 鄕(자향)에서 公(공)의 靈(영)을 敬虔(경건)하고 편안하게 모시어 三世(삼세)를 같이 배향할 때 아들은 부합하고 손자는 의지하여 神理(신리)가 진실로 착하도다. 俎豆(조두)가 높고 높으니 詩(시)를 읊고 풍악소리 洋洋(양양)하도다. 廟堂(묘당)이 山川(산천)의 光彩(광채)가 더하고 千秋(천추)에 어둡지 않을 것이니 공경히 香火(향화)를 받듭니다.

 

                                                       玉溪書院事實記(옥계서원사실기)

 

達城(달성)은 우리 서씨의 發祥(발상) 기지로서 櫓南先生(노남선생)을 여기 食邑(식읍)으로 봉한 까닭에 자손이 이로 인하여 본관을 한 것이라. 선생이 위로 板圖判書(판도판서) 達城君(달성군)과 그의 아들 達川君(달천군)의 끼친 아름다운 것을 이었으며 아래로 鶴巖公(학암공)과 龜溪公(구계공)에게 가법을 열어 주시었고 高麗(고려) 忠惠王朝(충혜왕조)에 벼슬하여 일찍이 文苑(문원)에 올라서 거듭 文衡(문형)으로 공명을 드날렸으니 文章(문장)과 勳業(훈업)이 위연하게 百世(백세)의 표준이 되었다. 때에 金蘭溪(김난계),鄭圃隱(정포은),李牧隱(이목은) 같은이가 다 그 도의로 사귀었다. 단지 한되는 것은 세대가 너무 멀어서 文獻(문헌)을 거의 잃었고 게다가 墳墓(분묘)조차 찾을 수 없으니 이것이 후손으로 세상이 다하도록 한되는 것이라. 어느날 元模(원모) 族氏(족씨)가 海東名賢(해동명현)을 韶州(소주) 義城(의성) 士人(사인) 집에 얻어서 두루 종중에 보이니 너덜한 故紙(고지)의 두어줄 유적은 거의 태산의 털끝과 鳳凰(봉황)의 한 깃과도 같으나 자취를 관찰하고 實狀(실상)을 고증하는데 오히려 日月(일월) 같이 빛나며 고금을 따지는 마당에 또 뭐 많기를 기필하랴. 이에 전도의 士林(사림)이 크게 發論(발론)하고 경허한 공의를 일으키어 庚戌年(경술년) 중추에 본원에 奉享(봉향)하니 일찍이 이곳은 鶴巖(학암),龍溪(용계) 양선생의 靈(영)을 편히 모신 곳이라. 부자를 아울러 배향한 것은 神人(신인)이 잘 協和(협화)할 것이니 또한 나타나고 숨는 것이 때가 있는 것처럼 덕이 가히 없어지지 않음을 볼 것이요. 떳떳한 倫常(윤상)을 좋아함은 이제 이제 옛과 다름없는지라. 이것은 慶幸(경행)을 견디지 못하는 사정이요. 또 元模(원모)씨가 조상을 위하는 정성에 감동되어 대략 전말을 敍述(서술)함이 右(우)와 같으니 오직 우리 뒤로 오는 諸宗(제종)은 지극한 뜻을 바꾸지 말고 이것으로 영세토록 추모를 부치면 매우 다행한 일이라.

 

                                               玉溪書院(옥계서원)의 毁撤(훼철)

 

玉溪書院(옥계서원)은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 중촌 마을 뒷편 풀밭등 아래 있었다고 傳(전)하나 정확한 遺址(유지)는 알 수가 없다. 朝鮮(조선) 正祖(정조)22년 戊午(1798)에 道(도) 儒生(유생)들의 相議(상의)로 創建(창건)되어 鶴巖(학암) 徐鈞衡(서균형)을 主享(주향)하고,櫓南(노남) 徐穎(서영)과 龍溪(용계) 徐忭(서변)을 配享(배향)하였다 한다. 高宗(고종)8년 辛未(1871)에 흥선대원군의 書院(서원) 撤廢令(철폐령)에 의하여 毁撤(훼철)된 후 復院(복원)하지 못하였다.

 

                                         玉溪書院(옥계서원) 祭享三賢(제향3현)

 

櫓南公(노남공) 徐穎(서영)

고려말 충신으로 號(호)는 櫓南(노남),본관은 (達城)달성으로 文章(문장)과 학식이 높았으며 과거에 급제하고,여러번 승진되어 恭愍王(공민왕)9년 庚子(1360)에 朝請郞尙食奉御(조청랑상식봉어)를 거쳐 重大匡金紫光祿大夫文下侍中贊成事(중대광금자광록대부문하시중찬성사) 達城君(달성군)에 이르렀다. 수많은 문하생을 길렀고 덕행이 높았으며 哲宗(철종)2년 辛亥(1851)에 櫓南公(노남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玉溪書院(옥계서원)에 아들 鶴巖公(학암)과 후손인 龍溪公(용계공)과 더불어 그 神主(신주)를 모시게 되었다.

 

鶴巖(학암공) 徐鈞衡(서균형) 1340~1391

字(자)는 商卿(상경)이고 達城徐氏(달성서씨)로 三重大匡(삼중대광) 達城君(달성군) 徐穎(서영)의 아들이다. 고려 忠惠王(충혜왕) 元年(원년) 庚辰(1340)에 출생하여 恭愍王(공민왕)9년 庚子(1360)에 文科(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은 政堂文學(정당문학) 文下贊成事(문하찬성사) 世子師傅(세자사부)에 이르렀다. 恭讓王(공양왕)3년 辛未(1391)에 卒(졸)하니 享年(향년) 52세라 나라에서 貞平(정평)이라 諡號(시호)를 내렸다.

 

龍溪公(용계공) 徐(서변)

字(자)는 子慶(자경)이고 號(호)는 龍溪(용계),본관은 達城(달성)이다. 부친은 思建(사건)이고,모친은 안동권씨로 通訓大夫(통훈대부) 軍資監(군자감) 主簿(주부) 諱(휘) 應龍(응용)의 딸이다. 朝鮮(조선) 宣祖(선조)38년 乙巳(1605)에 대구 산격에서 태어나 慕堂(모당) 孫處訥(손처눌) 문하에서 兄(형)과 함께 공부하였는데,16세 때 부친을 여의고 20세에 결혼하였다. 仁祖(인조)8년 庚午(1630)에 生員試(생원시)에 합격하고 仁祖(인조)11년 癸酉(1633) 11월에 明經科(명경과) 殿試(전시) 甲科(갑과) 2등으로 급제하여 西學(서학)의 敎授(교수)가 되어 漢城參軍(한성참군)에 임용되었는데 그때 나이 29세였다. 丙子胡亂(병자호란)이 일어나자 淸陰(청음) 金尙憲(김상헌)등과 함께 主戰派(주전파)로서 淸(청)과 和議(화의)를 강력히 반대하였으며,6월에 義禁府(의금부) 都事(도사)가 되었다. 仁祖(인조)17년 己卯(1639)에 黃州判官(황주판관)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鎭海縣監(진해현감)으로 임명되었는데 백성들이 인자한 정치에 감사하여 碑(비)를 세웠다. 仁祖(인조)22년 甲申(1644)에 成均館(성균관) 典籍(전적),이듬 해 乙酉(1645)에 延曙道(연서도) 察訪(찰방),仁祖(인조)25년 戊子(1648)에 安州判官(안주판관),辛卯(1651)에 내직으로 들어와 成均館(성균관) 直講(직강),壬辰(1652)에 禮曹正郞(예조정랑)에서 洪淸道(홍청도) 都事(도사),癸巳(1653)에 다시 내직으로와 禮曹正郞(예조정랑)겸 春秋館(춘추관) 記注官(기주관)이 되었다.

孝宗(효종)4년 癸巳(1653) 3월에 가뭄이 오래 계속되어 왕이 친히 祈雨祭(기우제)를 지내고 이로 인해 단비가 내려 왕이 기뻐하여 13인의 弘文館(홍문관) 玉書臣(옥서신)을 불러 喜雨詩(희우시)를 짓게 하였는데 이 때 龍溪(용계) 徐忭(서변)이 장원하여 말안장 1점,호피 1장,호초 5근을 받았다고 하며 화공이 그린 "孝宗御前喜雨詩會人物圖(효종어전희우시회인물도)"도 함께  상으로 받았다. 그림에는 장원한 詩(시)와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1974년 12월 10일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어 達城徐氏(달성서씨) 縣監公派(현감공파) 大逸門中(대일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 6월에 豊基郡守(풍기군수),乙未(1655)에 西學敎授(서학교수) 禮曹正郞(예조정랑),丙午(1656) 5월에 天安郡守(천안군수)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나려 할 무렵 이 베푼 연회석에서 承旨(승지) 柳道三(유도삼)이 취중에 大君(대군)에게 臣(신)이라 稱(칭)한 것을 듣고 왕실을 謀反(모반)하려는 기미가 보인다고 과장하여 告變(고변)하며,麟平大君(인평대군)의 세력을 꺽을 것을 청하니 孝宗(효종)이 크게 진노하여 친히 鞫問(국문)을 하였는데,右議政(우의정) 沈之源(심지원)공이 御前(어전)에 나아가 諫(간)하고,司諫(사간) 尹鏶(윤집)공이 司憲府(사헌부)에 나가 아뢴 후에 임금의 瞋怒(진노)가 조금 풀리어 특별히 죄를 감하여 流配(유배)하기를 명하였다. 公(공)의 가마가 南門(남문) 밖을 나가 여관에 들렀는데 밤에 괴로워하다 끝내 杖毒(장독)으로 5월 17일에 생을 마쳤으니 享年(향년) 52세였다. 그 후 肅宗(숙종)6년 庚申(1680)에 麟平大君(인평대군)의 두 아들 楨(정)과 枏(남)이 逆謨(역모)로 처형되니 사람들이 비로소 公(공)의 先見之明(선견지명)에 탄복하고 이숙공이 公(공)의 후손에게 官職(관직)의 길을 열어주었고,寃罪(원죄)를 씻어주자는 의견을 내어 英祖(영조)44년 戊子(1768)에 伸寃(신원)되어 禮曹參議(예조참의)에 贈職(증직)되고 純祖(순조)30년 庚寅(1830)에 士林(사림)의 公論(공론)으로 玉溪書院(옥계서원)에 配享(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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