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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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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8 16:28

구암서원 묘정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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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 묘정비명을 국역과 원문을 함께  실었습니다.

* 묘정비는 영조34년(1758)에 수비(竪碑)하였으며

* 비각은 정조12년(1788)에 건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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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 묘정비명

한 고을 선비로서 도학과 행의가 후생에게 모범이 된다면 곧 그를 제사지내고 벼슬과 공적이 세상에 널리 드러나면 또한 그를 제사 지내나니 진실로 이것이 옛날의 이른바고을 선생이 죽으면 제사 지낸다는 것이다. 그 베푼 바가 한 고을에 두루 미치고 은택이 끝없이 흘러내려서 오래될수록 더욱 잊혀지지 않는 분이라면 그 은덕에 보답하기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으리오.

오직 이곳 대구의 달성은 곧 우리 서가 성씨를 얻은 이후로 대대로 살아 온 곳이다. 지형은 말()처럼 우묵하고 주위가 자연적인 성을 이루었으니 영남 도회의 요충지이다.

예전 세종조에서 그 땅에 성을 쌓고 창고와 관아를 짓고자 그 땅에 대한 보상을 논의하였는데 이때 그 땅에 구계龜溪 선생이란 분이 계셨는데 한 마을 일족과 더불어 조정의 명에 따라서 남산의 옛 역참 터로 옮겨 살며 그 보상을 사양하고 백성들이 본부本府에 납부하는 환곡還穀의 이자를 한 섬에 다섯 되씩을 줄여주기를 원하여 백성에 혜택을 입히니 이것이 제가諸家의 장고掌故 및 본부의 읍지邑誌에 실려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삼백 육십 고을에 홀로 대구大丘에만 있는 바이다.

대저 조적법糶糴法(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거두어들임=환곡)은 한 고을의 큰 정사政事로서 한 말에 한 되의 이자는 고금에 바뀌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부호한 집이 아니면 빌릴 때는 즐거우나 갚을 때는 끝내 곤란함을 면치 못한다. 가난한 백성들은 한 해 동안 괴롭게 일하여도 조금치도 쌓아 둔 곡식이 없으므로 고을의 아전이 날뛰고 설치며 관부에서 추달하게 되니 솥과 송아지를 팔아도 모자라는 부분을 완전히 채울 수 없다. 이러한 때에 한 되나 한 홉을 덜어줌이 있더라도 오히려 마땅히 감사의 송덕비를 세우기에 급할 것이거늘 하물며 한 부의 백성 집이 몇 천호가 되며 환곡의 이자가 몇 천섬이나 되는지 모를 정도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랴 !

매호마다 한 섬에 그 닷 되씩을 계산 한다면 천호에 오천 되이고, 만호에 오만 되이다. 이것이 지금 사백여년에 이르렀으니 그 쌓인 숫자는 셈에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사람마다 그 은혜를 받아서 천만년을 지난다면 그 백성을 이롭게 한 정책은 넓고도 길 것이며 사람을 사랑한 뜻은 은미하고 심원하리라.

! 공이 조정에 나가서 이러한 마음을 미루어 정치를 행하였다면 온 나라 백성을 모두 착하게 만듦에 반드시 옳은 방법을 갖추었을 것인데 애석하게도 한 고을에만 은택을 끼치고 온 나라에 두루 미치지 못하였을 뿐이라.

옛날에 중국의 경상초庚桑楚가 외루에 삼년을 살았는데 외루 땅에 크게 풍년이 들자 외루의 백성들이 서로 더불어 그를 제사 지냈다. 주자朱子께서 일찍이 장자가 말한 뜻을 취하여 암자에 편액 하였으니 그것을 향모向慕한 바가 깊었던 것이다. 대저 외루의 백성은 삼년간의 풍년을 얻은 데 불과했으나 오히려 거의 성인에 가깝다고 여겼으니 지금 대구의 백성이 공의 은덕을 갚고자 한다면 비록 온 고을이 집집마다 신주와 제문을 갖추어 제사지내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현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숭현사崇賢祠를 부의 남쪽에 창건하였으니 대저 어찌 때를 기다림이 있어서 그러했겠는가. 수십 년 뒤에 원근의 선비들이 의논을 일으키고 정성을 함께 하여 달성 구암龜巖의 북쪽으로 이건하였으니 이곳은 곧 선생이 살았던 옛 마을이다. 그 옛 제도에 의거하여 크게 단장하고 또 우리 방조傍祖인 사가四佳선생과 우리 선조인 함재涵齋 약봉藥峯 두 선생을 차례로 추향追享 하였다. 대개

사가공은 이 지방에서 떨쳐 일어났는데 문장과 재주가 있음으로 인하여 광릉光陵 때에 의정부를 맡아 다스렸다.

함재공은 퇴계선생에게 수업하였는데 덕행이 순수하고 지극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약봉공은 선조가 임진왜란을 평정한 초기에 본도를 맡아 지켰는데 공로가 성대하게 드러났으니 모두 고향 사람들이 대대로 받들어 섬기는 분이다. 진실로 이 분들이 머물며 쉬셨던 자취가 있으면 이곳이 앞에서 이른바 향선생鄕先生을 제사지낼 만한 곳이 되는 것이다. 인하여 항렬에 따라 신위神位를 모신 사당을 만들었으니 아! 매우 성대하도다. 또한 이 서원이 만들어짐은 어찌 달성에서 근원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구계공의 후손인 한중漢重이 일찍이 사당 뜰에 비석을 세우려고 이미 비석을 다듬어 놓았으나 일을 끝내지 못하였다. 지금 아들 옥이 부친의 뜻을 이으려고 천리 먼 길을 달려와서 나에게 서술해 주기를 청하니 장차 빗돌에 새겨서 비석을 세우려는 것이다. 돌아보건대 나는 정신이 흐리고 문장이 졸렬하여 진실로 이 분들의 공적을 펼쳐 드러낼 수 없지만 이는 우리 서씨에게 있어서 실제 계보와 가승에 관계된 일이기에 어찌 감히 끝내 사양할 수 있으리오.

구계공龜溪公의 휘는 침이요 벼슬은 전의소감제처사이다. 보계譜係는 여조麗朝의 판도판서 휘이 시조이며 공의 고조고이다. 의 휘는 균형鈞衡이니 공민왕 경자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당문학을 지낸 정평공貞平公이다. 는 광산김씨 전의부령典議副令 영리英利의 따님이다. 공의 묘소는 부북府北 공산면 중심리 간좌 언덕에 있고 배이씨와 상하분이다. 자손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번성하니 공의 행적은 세대가 멀어서 징험할 수 없으나 백성을 위한 이 하나의 사실을 통해서도 마땅히 그 후손에게 남는 경사가 있을 것이다.

사가공四佳公의 휘는 거정居正이니 공과 관향은 같으나 계파가 다르다.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문형文衡을 맡아 보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함재공涵齋公의 휘는 해이니 사가공의 종증손이다. 불행히도 일찍이 세상을 떠나셨는데 언행이 복주의 고명한 선비 이중립이 지은 뇌문에 실려 있다.

약봉공藥峯公의 휘는 성이니 함재공의 아드님이다. 벼슬이 판중추에 이르렀고 시호가 충숙忠肅이다. 이공二公의 사업은 찬란히 국사에 실려 있으니 여기에 덧붙이지 않고 이에 명을 짓노라.

 

찬란한 달성 땅은 우리 서씨가 비롯한 터전이니

신령한 근원 널리 퍼져 있고 맑은 기운이 도와주네

인걸은 산 같이 탄생하고 지역은 하늘이 낸 풍요한 곳인데

구계공 같은 분이 진실로 이 땅에 대대로 살았다네

나라에서 그 땅에 축성코자 바야흐로 후한 대가를 주려할 제

공께서 머리저어 사양하시니 다른 이가 구하는 바와 다름이 있었네

우리의 옛 터전을 버리시고 함께 옮겨 가 사시면서

한 섬에 다섯 되씩 줄여주길 청하니 환곡의 이자 법이 새로워졌네

어진 사람 끼친 이로움 넓기도 해서

만세토록 영원히 그 은혜 입게 되었도다

이 서원을 보살피고 그 공에 보답함을 게을리 하지 말지니라

백성들은 순박한지라 그들이 어찌 은혜 입음을 모르리오

환곡 갚는 길에 서원 아래 지나면서 몸 굽혀 공경 하도다

이에 우리 삼현三賢을 항렬의 순서대로 받들었으니

문충공은 고아한 문장으로 이름나서 끼치신 향기로움이 끝없이 전해지리

함재공의 돈독한 뜻

충숙공이 크게 이었으니

아름답고 찬란한 덕과 공적이 이곳에 있어 가히 제사드릴만 하도다

고향 마을은 영광을 더하고 남기신 은택은 변함이 없으니

달성은 이지러지지 않으며 구암서원 무궁하여

영원토록 풍결한 제물로 제사 드리리

이에 정석貞石에 글을 새겨서 우뚝히 사당 가운데 세우노라.

 

충숙공 사세손 숭정대부 원임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 세자좌빈객

忠肅公四世孫崇政大夫原任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世子左賓客

홍문관제학 치사봉조하 종급이 짓고

弘文館提學致仕奉朝賀宗伋撰

        오세손 병조참판 명신이 전자를 쓰고

        五世孫兵曹參判命臣篆

        육세손 행세자익위사 위솔 무수가 글씨를 쓰다

        六世孫行世子翊衛司衛率懋修書

       

 

 

龜巖書院廟庭碑銘

一鄕之士道學行誼儀範後生則祀之仕宦功業布顯中外則祀之洵是古所謂

鄕先生沒而可祭者也如其施遍於一同澤流於無垠愈久而愈不可忘者則其

所以崇報之者是尤曷可少耶惟玆大丘之達城卽我徐之得姓以來世居之地

地形斗隩周遭天作嶺以南一都會地要區也昔在 世宗朝爲說城庫官其地

而論其賞時則有龜溪先生乃與一村同人依 朝命徙居于南山故驛基辭其

賞而願減本府糴耗逐石五升以惠民此載於諸家掌故及本府邑誌而我東三

百六十州之所獨有也夫糶糴之法爲州家之一大政而每一斗耗一升宲古今

不易之規然而自非富室豪戶終不免樂於受而艱於納若乃蔀屋小民終歲作

苦無儋石之儲而里胥之所隳突官府之所捶撻挈賣鼎犢猶未能完欠於此而

一有升龠之捐猶當銘謝感頌之不暇況此一府之民不知幾千戶糴穀不知幾

千石戶戶石石計其五升焉千爲千五升焉萬爲萬五升焉而今此至四百年所

則積之之數殆巧歷之所不能算而人人之受其賜率是將千萬世其利民之政

普而長愛人之意微而遠矣噫如使公進爲於 朝推是心而行乎政則其所以

兼善一國之民者必有其道而惜乎專一州而不咸焉耳昔庚桑楚居畏壘三年

畏壘大穰畏壘之民相與俎豆之朱夫子嘗取其義而扁諸庵其所慕尙者深矣

夫畏壘之民不過得三年之穰而其猶曰庶幾其聖人乎則今丘之民欲報我公

之德者雖環一州家戶而戶祝之未足爲泰而至 顯宗朝始創崇賢祠于府南

夫其有待而然歟後數十年遠近章甫倡義齊誠移建于達城龜巖之北乃先生

之故里也因其舊制而崇飾之又以我傍祖四佳先生曁我先祖涵齋藥峯兩先

生次第追享蓋四佳公舊跡玆土以文章才猷際遇 光陵贊治黃閣涵齋公受

業退陶德行純至爲士林所推仰藥峯公當 宣廟重恢之初守臬本道功勞茂

著均爲貫鄕世篤之賢而實有杖屨茇舍之跡則向所謂鄕先生可祭者皆是也

而仍成族位之祠吁其盛矣亦豈非斯院之作實原於達城而然耶龜溪公後孫

漢重曾營竪碑於廟庭旣伐石而工未訖今其子鈺爲繼先志不遠千里屬余以

敍述將刻畫而樹之顧余神思耄昏文詞荒拙固不足以舖張闡揄而此於我徐

氏實係家乘中事則亦何敢終辭也龜溪公諱沉典醫少監制處使譜自麗朝版

圖判書諱晉始於公爲高祖考諱鈞衡恭愍庚子文科政堂文學諡貞平公妣光

山金氏英利之女也公墓在府北山中心艮坐之原與配李氏爲上下塋子姓迄

今蕃衍公之行蹟世遠莫徵而卽此一事宜其有餘慶也四佳諱居正與公籍同

而派異宦左贊成典文衡達城君涵齋諱嶰四佳之從曾孫不幸蚤歲言行備載

於福州高士李中立誄文藥峯諱渻涵齋之子也官判中樞諡忠肅二公事業爛

焉在國史玆不復贅云銘曰

奕奕達城肇基我徐靈根布濩淑氣扶輿人維岳降地亦天府有若龜翁寔世其

土官爲設險方且厚酬公則掉頭異乎人求捨我靑氈同此闔境耗蠲五升糴報

新政仁人利博萬歲永賴有翼祠宮報事無怠民之質矣汝豈知蒙糴路院下亦

祗以躬越我三賢奉以族位文忠鳴雅遺芬未沫涵齋篤志忠肅大之德懿事功

可祭在斯梓里增光棠陰依舊達城不騫龜巖不仆歲歲年年豆爵潔豊銘于麗

牲屹立廟中

 

忠肅公四世孫崇政大夫原任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世子左賓客

弘文館提學致仕奉朝賀宗伋撰

        五世孫兵曹參判命臣篆

        六世孫行世子翊衛司衛率懋修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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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2018.03.03 22:49

    평소 부위원장님의 정성과 노고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귀하고 많은 문헌에 대한 정서와 국역으로 종원들께 문중의 소중한 정보를 올려주시는 노력에 대한 존경을 표합니다.

    또한 정서와 번역의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노력이 많이 드는 일인지를 깊이 실감하고 있습니다. 아마 문중의 발전과 종원님들께도 큰 도움이 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 ?
    서일수 2018.05.06 18:51

    누구도 감당키 어려운 엄청난 국역의 노고에 대해 감사를드립니다.

    감히 주제 넘은 일일런지 모르겠습니다만, 대구읍지 필사 원문을 살펴보건대 일부 한자 및 국역 오류가 있을 듯하여 참고 의견을 올리오니 살펴주시고 지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용 중에 龜溪公 후손 漢重의 아들(子)은 징 '鉦(정)'이 아니라 보배 '鈺(옥)'으로 사료되며,

    均衡의 妣는 광산김씨 '英利'의 따님이 아니라 '遠鳴'의 따님이 아닐런지 자문해 봅니다.

    아니면 읍지의 원문과 다르게 국역한 이유가 있을런지요?

  • ?
    서성태 2018.11.22 02:10

    일수씨에게 ! 차일피일 하다가 이제야 답을 드립니다.

     

    - 漢重의 子 諱字는 묘정비에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족보에 鈺(옥)이어서 수정하였습니다.

     

    - 鈞衡의 비(女+比)는 보책에 達城君夫人益陽李氏 입니다.

     

    그리고

    - 鈞衡의 비가 아니고 配를 말하는것 같은데 균형의 배는 舊譜에는 光山君文敬公遠鳴의 女라 되어 있으나 그 후에 광산김씨 족보를 상고하여 光山金氏典議副令英利之女로 訂正되었습니다.


    그리고 원문중에서
    전략...龜溪公諱沈典醫少監制處使譜自麗朝版圖判書諱晉始於公爲高祖考諱鈞衡恭愍庚子文科政堂文學諡貞平,公妣光山金氏英利之女也...후략

    위 문장의 해석에서는 ...政堂文學諡貞平에서 위와 같이 구두점을 찍어 문장을 단락하고 다음에 公妣光山金氏英利之女也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公妣의 公은 龜溪公을 지칭하고 公妣는 구계공의 어머니를 지칭하므로 光山金氏英利之女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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