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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경주부-대구군(大丘郡) / 옮겨 온 글입니다.

by 서성태 posted Jan 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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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군(大丘郡)

본래 달구화현(達句火縣)인데, 경덕왕이 대구(大丘)로 이름을 고쳐서 수창군(壽昌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 무오에 경산부(京山府)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인종(仁宗) 21년 계해에 비로소 현령(縣令)을 두었다.【바로 송나라 고종(高宗) 소흥(紹興) 13년이다.】 본조(本朝) 금상(今上) 원년 기해에 1천 호(戶) 이상이 됨으로써 지군사(知郡事)로 올렸다. 속현(屬縣)이 3이니, 수성현(壽城縣)은 본디 위화군(喟火郡)인데, 경덕왕이 수창군(壽昌郡)으로 고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해안현(解顔縣)은 본디 치성화현(雉省火縣)【미리(美里)라고도 한다.】 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장산군(獐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무오년에 모두 경주(慶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공양왕 2년 경오에 비로소 수성(壽城)ㆍ해안(解顔) 겸 감무(兼監務)를 두었는데, 본조(本朝) 태조 3년 갑술에 감무(監務)를 혁파하고 대구(大丘) 임내(任內)를 삼았으며, 1세(世)를 지나서 도로 경주(慶州)에 붙였다가, 태종 14년 갑오에 다시 대구에 붙였다. 하빈현(河濱縣)은, 본디 다사지현(多斯只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수성군(壽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 무오년에 경산부(京山府)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대구 임내로 삼았다. 소(所)가 1이니, 자이(資已)이다.
진산(鎭山)은 연구산(連龜山)이다.【속담에 전하기를, “돌거북[石龜]을 만들어서 산등성이에 간직하여,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북쪽으로 꼬리를 두게 하여 산기(山氣)를 통하게 한 까닭으로, ‘연구산’이라고 이른다.”고 한다.】 공산(公山)【해안현(解顔縣) 북쪽 11리 거리에 있다. 신라 때에 부악(父嶽)이라 일컫고, 중악(中嶽)에 비겨 중사(中祀)로 삼았는데, 지금은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 금호(琴湖)는 그 근원이 영천(永川) 무자산(毋子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서 군(郡) 북쪽으로 지나가고, 또 서남쪽으로, 흘러 낙동강(洛東江)으로 들어간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경산(慶山)에 이르기 23리, 서쪽으로 성주(星州)에 이르기 41리, 남쪽으로 청도(淸道)에 이르기 35리, 북쪽으로 의흥(義興)에 이르기 35리다.
본군(本郡)은 호수는 4백 36호, 인구가 1천 3백 29명이며, 수성(壽城)의 호수가 2백 64호, 인구가 6백 44명이요, 하빈(河濱)의 호수는 3백 51호, 인구가 1천 2백 49명이며, 해안현(解顔縣)의 호수는 1백 98호, 인구가 1천 2백 단(單) 3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51명, 진군(鎭軍)이 1백 단(單) 5명, 선군(船軍)이 4백 54명이다.
본군(本郡)의 토성(土姓)이 5이니, 백(白)ㆍ하(夏)ㆍ배(裵)ㆍ서(徐)ㆍ이(李)이며, 내성(來姓)이 1이니, 도(都)이다. 수성(壽城)의 성이 4이니, 빈(賓)ㆍ나(羅)ㆍ조(曺)ㆍ해(嵇)이며, 내성(來姓)이 7이니, 유(柳)ㆍ장(張)ㆍ최(崔)ㆍ신(申)ㆍ유(劉)ㆍ고(高)ㆍ정(鄭)이요, 속성(續姓)이 6이니, 예(芮)【부계(缶溪)에서 왔다.】ㆍ진(陳)【계성(桂城)에서 왔다.】ㆍ최(崔)【보령(保寧)에서 왔다.】 이요, 김(金)이 둘,【하나는 김해에서 왔고, 하나는 청도(淸道)에서 왔다.】ㆍ이(李)【본관은 알지 못한다. 모두 향리가 되었다.】 이다. 하빈(河濱)의 성이 3이니, 신(申)ㆍ이(李)ㆍ송(宋)이요, 해안(解顔)의 성이 5이니, 모(牟)ㆍ백(白)ㆍ하(河)ㆍ신(申)ㆍ정(丁)이며, 내성(來姓)이 3이니, 제(諸)ㆍ진(秦)ㆍ박(朴)이고, 속성(續姓)이 1이니, 한(韓)이다. 자이소(資已所)의 속성(續姓)이 1이니, 김(金)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서로 반반씩이며, 기후는 따뜻하며, 풍속은 묘종(苗種)을 좋아한다. 간전(墾田)은 6천 5백 43결이다.【논이 10분의 3이 넘는다.】 토의(土宜)는 벼ㆍ기장ㆍ피[稷]ㆍ보리ㆍ삼[麻]ㆍ목면(木綿)이며, 토공(土貢)은 호도ㆍ대추ㆍ잣ㆍ석이[石茸]ㆍ칠(漆)ㆍ종이ㆍ지초(芝草)ㆍ입초(笠草)ㆍ은구어(銀口魚)ㆍ여우가죽ㆍ삵가죽ㆍ노루가죽ㆍ잘(山獺皮)이요, 약재(藥材)는 천문동(天門冬)ㆍ당귀(當歸)ㆍ맥문동(麥門冬)이다. 도기소(陶器所)가 2이니, 하나는 해안현(解顔縣) 동촌(東村) 여리(汝里)에 있고, 하나는 수성현(壽城縣) 남촌(南村) 상원동(上院洞)에 있다.【모두 하품이다.】
읍 석성(邑石城)은 군(郡) 서쪽 2리에 있다.【둘레가 4백 51보이며, 안에 샘이 둘이 있다.】 금학루(琴鶴樓)【객사(客舍) 북쪽에 있다.】 역(驛)이 2이니, 범어(凡於)와【수성(壽城)에 있다.】 신역(新驛)【하빈(河濱)에 있다.】 이다. 봉화가 2곳이니, 법이산(法伊山)은 수성현 남쪽에 있고,【남쪽으로 청도(淸道)의 팔조현(八助峴) 봉화에 응하고, 북쪽으로 경산(慶山)의 성산(城山) 봉화에 응한다.】 마천(馬川)은 하빈현 남쪽에 있다.【남쪽으로 화원(花園) 성산(城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성주(星州) 각산(角山)에 응한다.】 큰 방죽[大堤]이 4이니, 성당(聖堂)ㆍ불상(佛上)【군(郡) 경내에 있다.】ㆍ둔동(屯洞)【수성(壽城) 지경에 있다.】ㆍ부제(釜堤)【해안(解顔) 지경에 있다.】 이다. 입암(笠岩)【군(郡) 동쪽 2리 가량 되는 새내[新川] 가운데 있다. 돌이 높이 서 있는데, 시속에서 ‘갓바위’[笠岩]라고 부른다. 세상에 전하기를, “별이 떨어져서 돌이 되었다.”고 한다.】
【원전】 5 집 639 면



 

大丘郡: 本達句火縣, 景德王改名大丘, 爲壽昌郡領縣。 高麗 顯宗戊午, 屬京山府任內, 仁宗二十一年癸亥, 始置縣令。 【卽宋 高宗 紹興十三年。】 本朝今上元年己亥, 以千戶以上, 陞爲知郡事。 屬縣三。 壽城縣, 本喟火郡, 景德王壽昌郡, 高麗改今名。 解顔縣, 本雉省火縣, 【一云美里。】 景德王改今名, 爲獐山郡領縣。 顯宗戊午, 皆屬慶州任內。 恭讓王二年, 庚午, 始置壽城解顔, 兼監務。 本朝太祖三年甲戌, 革監務, 爲大丘任內, 歷一世而還屬慶州太宗十四年甲午, 復屬大丘河濱縣, 本多斯只縣, 景德王改今名, 爲壽城郡領縣。 顯宗戊午, 屬京山府任內, 後爲大丘任內。 所一資己。 鎭山, 連龜 【諺傳作石龜藏于山脊, 南頭北尾, 以通山氣, 故謂之連龜。】 公山 【在解顔縣北十一里, 新羅時稱父嶽, 擬中嶽爲中祀。 今令守令行祭。】 琴湖, 其源出永川 母子山, 西流過郡北, 又西南入于洛東江。 四境, 東距慶山二十三里, 西距星州四十一里, 南距淸道三十五里, 北距義興三十五里。 本郡戶四百三十六, 口一千三百二十九。 壽城戶二百六十四, 口六百四十四。 河濱戶三百五十一, 口一千二百四十九。 解顔縣戶一百九十八, 口一千二百單三。 軍丁, 侍衛軍五十一, 鎭軍一百單五, 船軍四百五十四。 本郡土姓五, ; 來姓一, 壽城姓四, ; 來姓七, ; 續姓六, 【缶溪來。】 【桂城來。】 【保寧來。】 二、 【一金海來, 一淸道來。】 【本貫不知, 皆爲鄕吏。】 河濱姓三, 解顔姓五, 。 來姓三, ; 續姓一, 資己所續姓一, 。 厥土肥塉相半, 風氣暖, 俗好苗種, 墾田六千五百四十三結。 【水田十分之三强。】 土宜, 稻、黍、稷、麥、麻、木綿。 土貢, 胡桃、棗、松子、石茸、漆、紙、芝草、笠草、銀口魚、狐皮、狸皮、獐皮、山獺皮。 藥材, 天門冬、當歸、麥門冬。 陶器所二, 一在解顔東村汝里, 一在壽城南村上院洞 【皆下品。】 邑石城, 在郡西二里。 【周回四百五十一步, 內有泉二。】 琴鶴樓 【在客舍北】 驛二, 凡於 【在壽城。】 新驛。 【在河濱。】 烽火二處, 法伊山, 在壽城縣南, 【南準淸道 八助峴, 北準慶山 城山。】 馬川河濱縣南。 【南準花園 城山, 北準星州 角山。】 大堤 四, 聖堂佛上 【在郡境。】 屯洞 【在壽城境。】 釜堤 【在解顔境。】 笠岩 【在郡東二里許, 新川中有石屹立, 俗號笠岩, 世傳星隕爲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