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대구역사<자료출처:대구광역시>

by 서정우 posted Apr 12, 201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선사시대

우리 고장 대구는 금호강과 신천으로 둘러싸인 기름진 들판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살기 좋은 자연적 조건을 갖추어 이 고장의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그동안 대구지역 선사시대 중 공백기로 여겨졌던 구석기, 신석기시대를 채워주는 고고학적 성과가 월성동, 서변동유적 등에서 하나 둘 확인되면서 대구에는 구석기시대인 대략 2만년 전부터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또한 대구지역에서는 고인돌과 비파형동검, 민무늬토기를 대표로 하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많이 발견되어 당시 대구가 좋은 자연환경, 교통의 요지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이 해방 전까지 대구역 부근, 달성공원 부근을 비롯해 동남쪽으로 봉산동, 대봉동에서부터 수성들에 이르기까지 줄지어 있었으나, 시가지의 확장으로 인해 지금은 대부분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고인돌은 당시 이것을 만들 수 있었던 세력 집단들의 정치 및 사회상과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빗살무늬토기(서변동유적)상동 고인돌
 

원삼국 · 삼국시대

이러한 대구지역의 청동기사회는 새로운 초기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아 국보제137호인 대구 비산동 출토 동기류중 세형동검을 비롯해 만촌동, 평리동 등에서 청동거울 · 꺾창과 같은 보다 다양한 청동기가 출토되어 다각도로 변하는 대구의 사회변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이전의 청동기는 의식용이나 장식용으로 쓰이게 되고, 철기는 실용의 도구나 농기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대구에는 지금의 달성토성을 중심으로 한 달구벌국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첨해이사금 15년(261)에 달벌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에 속한 큰 읍으로 발전했을 것입니다.

4세기경이 되면 삼국이 정립하게 되고, 지금은 주택가가 들어서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비산동과 내당동 일대에는 87기의 삼국시대 고분들이 일제강점기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이 고분에서는 경주와 유사한 양식의 금동관, 금제귀걸이 등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어 대구지역 중심집단의 무덤인 것을 알 수 있고, 이밖에도 불로동고분군, 구암동고분군, 성산리고분군 등이 존재해 신라에 통합되기 전 대구지역에 여러 정치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비산동 37호분 출토 금동관
 

통일신라시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신문왕 9년(689)에 신라의 도읍을 경주에서 달구벌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을 만큼 대구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신라의 오악(五岳) 가운데 팔공산을 중악(中岳)으로 숭배했던 점 등으로 보아도 그 당시 대구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행정체계인 군현체제 아래서 대구는 위화군과 달구화현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경덕왕 16년(757)에는 위화현이 수성군으로, 달구화현이 대구현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대구(大丘)'라는 지명이 기록에 나타나게 됩니다.
 

고려시대

후삼국시대에는 왕건과 견훤이 수도 경주를 차지하기 위해 팔공산에서 접전을 벌인 「공산전투」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대구가 신라 말까지도 왕경인 경주와 지방을 연결하는 군사 · 교통의 요충지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려 초기의 대구지역은 수성군, 대구현, 해안현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대구현은 수성군에, 해안현은 장산군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후 인종 21년(1143) 대구현에 현령관이 파견되면서 점차 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무신정권기에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났을 때 대구가 그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고, 몽고 침입기에는 부인사에 소장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었으며 전란을 피하여 팔공산 공산성에서는 항쟁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왕산과 신숭겸장군 유적
 

조선시대

조선이 세워진 후 대구는 농업의 주요 생산지로 인구가 점차 증가하였고, 또한 영남 내륙교통의 중심지로 부각되었습니다. 세종 1년(1419)에는 대구현이 대구군으로 승격되었으며, 세종 30년(1448)에는 복지제도인 사창(社倉)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설치되어 시범 운영되기도 하였습니다.

세조 12년(1466)에는 도호부가 설치되어 군사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높아지게 되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대구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이후 선조 34년(1601)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었고, 효종 9년(1658)에는 대구객사 주변에 약재시장이 개설되면서 약령시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대구는 영남지역의 행정 · 교통 · 군사를 통할하는 명실상부한 중심지역이 되었고, 해안현, 하양현, 경산현, 수성현, 화원현, 하빈현을 거느린 큰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근대

대구는 경상도 감영 소재지로서 영남지방의 중추기능을 계속해서 수행해 오다가, 1895년 지방제도의 개혁으로 8도에서 23부로 개편됨에 따라 대구관찰부가 설치되었고 예하 23개 군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듬해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대구부는 대구군으로 개칭되는데, 부청 소재지로서 그 관할구역과 지위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을사늑약으로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1906년 그 산하기관인 대구이사청이 설치되는 등 일제의 국권침탈은 가속화 되었습니다. 1910년 이사청을 폐지하면서 대구군은 다시 대구부로 바뀌게 되며, 부제는 1945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907년 대구의 서상돈, 김광제 등이 중심이 되어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금연, 금주로 되찾으려는 평화적이고 자발적인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또한 1915년 서상일 등은 영남지역의 독립투사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3 · 1만세운동에서 대구지역의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1927년에는 신간회 대구지회가 결성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의열단원 장진홍에 의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1930년대 이후에도 학생들의 비밀결사운동이 계속되었고,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위한 지속적인 항일 투쟁이 전개된 고장이었습니다.

 

 

현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지속적인 민족운동을 통해 광복을 맞이하게 됩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이듬해 지방자치법의 실시에 따라 대구부는 대구시로 개칭되었으며, 1950년 6 · 25 전쟁 중에 대구는 수많은 피난민의 피난처가 되었고, 낙동강방어전선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대구의 문화예술인은 민족의 애환을 그리는 창작활동을 전개하여 현대 문화예술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1960년 이승만 정부의 독재가 계속되자, 대구지역 학생들은 2월 28일 독재를 반대하는 시위를 감행하였습니다.
2 · 28민주운동은 이후 3 · 15 부정선거 규탄시위와 더불어 4 · 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1981년에는 달성군의 월배읍, 성서읍, 공산면, 칠곡군의 칠곡읍, 경산군의 안심읍, 고산면을 편입하여 대구직할시로 승격하였으며, 1995년에는 달성군을 편입하여 대구광역시가 되었고 행정구역의 광역화로 영남권 중추도시로서의 위상을 확립하였습니다.
그간 대구에서는 2002년 FIFA 한일월드컵, 2003년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2013년 세계에너지총회, 2015년 세계물포럼대회 등 큰 규모의 국제행사가 많이 개최되어 대구를 세계에 알리고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에 이르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