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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BC7세기

청동기인 정착

삼국

261
689
757

달벌성 축조
달구벌 천도 시도
위화군을 수성군으로, 달구화현을 대구현으로 개명

고려

927
1143
1232
1255

후백제군과의 공산전투
대구현을 현령관으로 승격
1232  부인사 대장경 소실
1255  공산성에서 항몽투쟁 

조선

1394
1419
1466
1601
1738
1895

대구현에 수성, 해안, 하빈 영속
대구군으로 승격
대구도호부로 승격
경상감영 설치
대구읍성 축조
지방제도 개편, 부청소재지

근대

1907
1915
1919
1927

국채보상운동 개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조직
3월 8일 대구독립만세운동
의열단원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 

현대

1949
1950
1958
1960
1981
1988
1995

대구시로 개칭
낙동강 방어선 전투
동촌, 가창, 월배, 성서, 공산 편입
2. 28 학생의거
직할시로 승격(6개구)
달서구 신설(7개구)
광역시로 명칭 변경, 달성군 편입(7개구 1개군) 

 

고대시대(古代時代)



















 

   대구지역에 최초로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던 것은 청동기 시대인 BC7세기경이라고 추정된다. 대구와 그 부근지역에서 구석기나, 신석기시대의 유물, 유적이 발견된바 없고 대봉동에서 간돌검(磨製石劍), 붉은 간토기(紅陶) 등이 출토 되었고 민무늬토기(無文土器)와 흠자귀, 반달형돌칼 등의 유물이 침산 연암산의 구릉지대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대구의 청동기 유물은 국보 137호인 비산동의 청동검을 비롯하여, 신천동과 만촌동, 서변동 등 대구지역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타지역의 청동기 유물보다 우수하여 청동기 시대 대구사회의 수준이 다른 지방보다 앞서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이 해방전까지는 대구역 부근, 달성공원 부근을 비롯 동남쪽으로는 봉산동, 대봉동에서부터 수성들에 이르기까지 있었으나, 도시확장으로 인해 지금은 대부분 없어지고 말았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무덤 유적으로 볼 때 지석묘(支石墓)축조시대, 석관묘(石棺墓)축조시대, 석실분(石室墳)축조시대를 거치면서 통합운동(統合運動) 이 일어나 소국(小國, 城邑國家)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생각이 된다.

   고대(古代)  대구는 금호강과 그 지류인 신천으로 둘러싸인 기름진 들판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삶이 살기 좋은 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많이 모여 살면서 이 고장의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삼국시대(三國時代)











 

    삼국시대(三國時代) 대구(大丘)는 소국(小國, 변진(弁辰) 24국 가운데 한 나라) 중심으로 성장하여 연맹체를 형성하면서 복속(服屬)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261년(점해이사금 15)에 달벌성(達伐城)을 쌓고  내마(奈麻) 극종(克宗)을 성주(城主)로 삼았다는 기록에 보면 3세기 중엽에 신라(新羅)에 복속된 것으로 보이고 5∼6세기경에 신라(新羅)의 완전한 지배하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라(新羅) 행정체계인 군현체제 아래서 대구는 위화군(胃火君)과 달구화현(達丘火縣)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757년(경덕왕 16)에는 위화군(胃火君)이 수창군(壽昌君)으로, 달구화현(達丘火縣)이 대구현(大丘縣)으로 개명되었다.

    689년(신문왕 9) 신라의 도읍을 경주에서 달구벌(達丘伐)로 옮기려 한 사실과 신라의 오악(五岳) 가운데 팔공산(八公山)을 중악(中岳)으로 숭배했던 점 등으로 보아도 그때 당시의 대구(大丘)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高麗時代)


















 

   고려시대(高麗時代) 대구지역은 후삼국의 혼란기에도 신라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로 인식되어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어 역사상 유명한 동수대전의 격전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고려(高麗)의 삼국통일이후 정치의 중심무대가 개경(開京)으로 옮겨지면서 신라(新羅)와 달리 비중이 낮아져 갔다.

   고려초기(高麗初期)에는 수성군(壽城郡) 대구현(大丘縣) 해안현(解顔縣)으로 나뉘어서, 수성군(壽城郡)이 대구현(大丘縣)을 영속(領屬)하고 있었고 해안현(解顔縣)은 장산군(獐山郡, 현 경산)의 영현(領縣)으로 편제되어 있었으며 1018년(현종 9)의 대대적인 군현개편과정에서 수성군(壽城郡)과 해안현(解顔郡)은 동경(東京)의 속군(屬郡) 속현(屬縣)이 되었고 대구현(大丘縣)은 경산부(京山府)의 14속현(屬縣)의 하나로 편입되었다.

   1143년(인종21년)에 대구현은 현령관(縣令官)으로 승격되면서 점차 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고 또한 12세기 후반 무신(武臣)의 난(亂)이 일어난 뒤 대구 부근의 청도(淸道), 밀양(密陽), 경주(慶州) 등지에서 민란(民亂)이 빈발하자 대구는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군사활동의 근거지가 되었고, 몽고 침입기에는 팔공산(八公山) 부인사가 대장경판과 더불어 소실되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으며 몽고의 5차 침입시기에는 대구(大丘) 주민들이 공산성(公山城)에 입보(入保)하여 끝까지 저항하는 항몽투쟁을 하였고 고려(高麗)말에 왜구의 약탈이 자행되면서 낙동강(洛東江), 금호강으로 바다로 연결된 대구에도 2,3차례 약탈 피해를 입었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비옥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대구는 농업의 중심로서 호구(戶口)가 점차 증가하였으며, 1394년(태조3년)에 대구현(大丘縣)이 수성현(壽城縣)과 해안현(解顔郡)을 영속(領屬)하여 확장 발전됨에 따라 1419년(세종1년)에는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하게 되었으며 1466년(세조 12)에는 도호부(都護府)을 설치하였다.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어 교육활동이 활발해졌으며, 1448년(세종30년)에는 복지제도인 사창(社倉)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시험 실시되어 성공하자 전국적으로 확대되기도 하였습니다.

   영남내륙 교통의 요지로서 그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1601년(선조34년)에는 경상도감영(慶尙道監營)을 대구부에 이전 설치하면서 영남지방(嶺南地方)의 중심지가 되면서 경산현, 하양현, 화원현을 포괄하는 거대한 거읍(巨邑)이 되었다. 이때부터 영남지방의 행정,사법,군무를 통할하는 명실상부한 중심지가 되었다.

   사창(社倉) : 지방 향촌이 공동으로 설치하여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곡식을 모아두었다가 흉년이 들 때나 굶는 자가 있을 때 대여하는 제도

근대(近代)





















 

   근대(近代)에는 경상도감영(慶尙道監營)소재지로서 영남의 중심적 위치를 누렸왔던 대구는 1895년에 시행된 지방관제 개혁에 따라 도(道)제도는 폐지되고 중앙에서 전국 23부(경상도4부(府) : 대구부, 안동부, 진주부, 동래부)를 바로 관할하게 되어 대구부 관할의 대구군으로 개칭되었으나 부청(府廳) 소재지(所在地)가 되었고 대구부의 관할도 23군으로 축소 되었다.

    1914년에는 다시 부제(府制)를 실시했으나 시가지(市街地)일대만 대구부로 독립하였고 나머지 지역은 달성군(達成郡)으로 편제되었다.

   개화(開化)의 물결이 밀려 들면서  1899년 달성학교(達成學校)를 효시(嚆矢)로 초등교육기관이 생기고, 1906년에는 계성학교(啓聖學校)가 설립되어 이듬해 개교한 신명학교(信明學校)와 더불어 근대적 중등교육관으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게 되어 교육, 문화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일제의 침입이 시작되면서 대구는 항일저항운동의 거점으로서의 역할 수행과 근대적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한 것이었다.  1907년에는 대구의 서상돈, 김광제 등이 중심이 되어 일제의 침략으로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금연, 금주, 절미로 되찾으려는 평화적이고 자발적인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전개하여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고,  1915년 서상일 등은 영남지역의 독립투사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朝鮮國權回復)단 중앙총부(中央摠部)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는데, 이 단체는 3.1만세운동에서 대구지역 운동을 주도하고 파리장서사건(波里長書事件)에 깊이 관여하였다.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가 조직되어 항일투쟁(抗日鬪爭)을 계속하였으며, 1930년대 이후에는 학생들의 비밀결사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민족항쟁(民族抗爭)의 본거지로서 그 모습을 뚜렷이 나타냈었다.

현대(現代)


















 

    현대(現代) 1945년 광복 이후 대구는 해외 귀환 동포의 정착과 월남 피난민들의 유입으로 인하여 급격한 인구증가가 있고 사회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미군정(美軍政)이 지속되던 1946년 10월1일 좌익(左翼)의 교묘한 선동에 의하여 10.1폭동사건이 일어나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낸 뒤 진압되었다.

    1949년에는 대구시로 개칭되었으며 1950년 6.25 동란시에는 낙동강 방어작전의 최후 보루도시로 민주주의를 지킨 역사에 길이 남을 대구전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대구의 문화예술인은 민족의 애환을 그리는 창작활동을 전개하여 현대 문화예술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1960년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독재(獨裁)가 심화되고 있을 때, 대구지역의 고등학생들은 2.28학생의거를 일으켜 반독재투쟁을 전개하였고, 그 뒤 4.19의거로 연결되어 우리나라 민주주의 정착에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게 되었다.

    1981년 달성군의 월배, 성서, 공산면, 칠곡군의 칠곡읍, 경산군의 안심읍 등을 편입하여 직할시로 승격하였으며, 1988년는 달서구 신설로 7개구의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다.

   1995년 1월에는 지방자치로 명칭을 대구광역시로 개칭하고, 1995년 3월에는 달성군을 편입하여 "7개구 1개군"으로 행정구역이 광역화되어 영남권 중추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자료출처 : "대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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