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達城)
소 재 지 : 대구시 중구 달성동 294-1
사적 제 62 호 지정일자 : 1939년 10월 18일
크 기.구조 : 6필지 39,256평
형 식 : 토성에 석축
축성시대 : 신라시대 초기
달성(達城)은 자연적인 구릉을 이용하여 그 위에 쌓은 토성이다. 그러나 대구시 중구 달성동 224번지 일대의 이 구릉은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성터로서 알려지기 보다 대구 시민이 즐겨 찾는 공원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달성(達城)은 청동기시대 이래로 이미 대구지역에 소국(小國)을 형성하고 있던 정치집단(政治集團)이 그들의 생활근거지였던 낮은 구릉에 성을 쌓아 세력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달성(達城)의 이름은 달구화(達句火)에서 유래된 것이다. [達]은 [달구벌]의 [달구] → [닭] → [닥] → 또는 [달]에서 온 말이다. 달성은 경주의 월성(月城)처럼 평지에 있는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축성하였으나 청동기시대 이래 이미 이 지방의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이 그들의 생활근거지에 성곽을 쌓은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성벽의 아래층 위에는 조개무지 유적이 있고, 목책(木柵)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적갈색 무문토기(無文土器)와 회색 타인문토기(打印文土器)등 여러시대의 토기가 발견된 점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이 곳에서 계속 살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난 성곽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성(城)의 지세(地勢)는 평지에 솟은 구릉지로서, 북서쪽이 높고 남동쪽이 낮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북쪽과 동쪽의 성벽은 하천에 의해 생긴 자연 단애(斷崖)를 그대로 이용하였고, 남서쪽은 비산동(飛山洞)과 내당동으로 연결되는 구릉지를 차단하기 위하여 흙과 돌로 높게 성벽을 쌓았다.
달성(達城)의 토성(土城) 축조시기는 대체로 '달구벌의 부족국가 시대'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달성의 축성시기를 두고 일부 학자들은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토성축조는 한(漢)의 낙랑군의 토성(土城)을 본받았으므로 기원전 2세기말 이후에 축조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경기도 광주(廣州)의 풍납리(風納里 : 현재 서울시 성동구) 토성은 그 곳에서 출토된 목탄(木炭)을 자료로 하여 '방사선 동위원소 탄소 연대 측정'을 한 결과 1770 ± 120 B.P 의 연대가 나왔다. 이 연대에 비추어 보아 대체로 기원전 2세게 경의 유적임을 알 수 있다. 달성(達城)도 이와 비슷한 연대로 보인다.
'달성 동편인 현재의 공원 입구의 성벽 측면이 노출하여 1969년 조사한 결과 이 성은 기원 3 - 4세기경에 최초의 축성이 있었고 그 후에도 수차례 증축한 흔적이 있었다. 달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김부식(金富軾)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1145년경에 편찬한 삼국사기 제 2 권에 '첨해니사금십오년춘삼월축달벌성이나마극종위성주'(沾解尼斯今十五年春三月築達伐城以奈麻克宗爲城主)라고 되어 있다. 즉 첨해왕 15년(261) 3월에 달벌성(達伐城)을 쌓고 나마극종(奈麻克宗)을 성주(城主)로 삼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은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첨해니사금 15년은 서기 261년으로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이 무렵의 기사(記事)는 아직 전설적인 기록이므로 역사적 사실로 볼 수 없다. 또 이 때 달구벌이 신라의 영토가 된 일이 없다. 물론 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달벌성(達伐城)과 달성(達城)을 같은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그러나 두 가지 견해에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달성(達城)은 빨리는 기원 2세기, 늦게는 기원 4세기경에 달성이 최초로 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달성과 인접한 비산동고분군(飛山洞古墳群)과 내당동고분군의 고분 묘제양식이 달구벌 부족국가 시대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1923년 3월과 10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조사 발굴된 보고서를 토대로 그 특색을 살펴보면
1. 가야묘제(伽倻墓制)처럼 무덤을 구릉 위에 축조하였다.(고대 신라 때에는 무덤을 평지에 축조하였다.)
2. 무덤의 구조를 냇돌 또는 판석으로 장방형 석실을 만들었다(낙동강 유역의 가야고분과 같다)
3. 출토된 유물이 고대 신라 것과 같은 것도 있으나 '달구벌 문화'의 특색을 보이는 것도 많다는 점 등이다.
따라서 달성은 달구벌 시대에 축조된 토성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도 달성은 여러 번 보수하여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대구지방의 중요한 진성(鎭城)으로서 구실을 하였으므로 달구벌시대 토성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된다.
조선 때의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는 대구부(大丘府 : 현재의 종로 초등학교 자리) 서쪽 4리에 석축이 있는데 주위가 944자, 높이가 4자이며 안에 세 우물과 두개의 못이 있고 군창(軍倉)도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달구벌 시대의 토성은 후대에 석축으로 쌓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달성의 석축시기를 1469 간행(刊行)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서는 홍무(洪武) 경오년, 즉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 2년(1390)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책 대구도호부조(大丘都護府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山城在府西二里許(산성재부서이리허)
洪武庚午石築(홍무경오석축)
周廻四百五十一步, 高六尺(주회사백오십일보, 고육척)
有軍倉, 井四, 冬夏不渴(유군창, 정사, 동하불갈)
즉 달성(達城)은 대구부(大丘府) 서쪽으로 2리에 있고 홍무(洪武) 경오년(庚午年) 즉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석축(石築)했으며 성의 둘레가 451보(步) 높이가 6척(尺)이며 군창(軍倉)이 있고 우물이 4개 있으며 이 우물은 겨울, 여름에 마르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현재의 달성은 넓이가 동서 약 380m, 남북 약 470m이다. 성안에 못과 우물이 있었다고 한 것은 산성에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될 조건으로 우리나라 산성의 특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달성은 선사시대 이래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대구 지방에서 상당히 중요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달성(達城)이 신라. 고려시대엔 관아(官衙)로 이용되었고 조선 초기까지 관아가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더라도 그 중요성은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달성을 이야기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달성서씨(達城徐氏)와의 관계이다. 고려 중엽인 정종(靖宗 : 1035 ∼1406)때 봉군제에 따라 달성을 달성서씨들에게 사전(賜田)으로 내려졌다. 사전이란 당시 국가에 공을 세운 관리들에게 준 토지를 말하는데 일대에 한하는 것과 세습의 두 종류가 있었다. 따라서 달성은 그후 달성서씨(達城徐氏)들의 세거지(世居地)로서 사유(私有)가 되었다.
조선 세종(世宗)때 대구(大丘)는 고려 현종(1018)때 부터 경산부(京山府 : 현재의 星州)의 속현이었으나 현(縣)보다 한 등급 높은 군(郡)으로 승격시키면서 대구(大丘)에 천연적으로 높은 성벽을 이루어 적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좋은 달성(達城)이 서씨(徐氏)의 세거지(世居地)라는 이야기를 듣고, 조정에서는 달성 서씨들에게 양도를 요구했다. 조정에서는 달성(達城)의 양도 조건으로
연신지(蓮信池 혹은 靈仙못 : 현재의 靈仙市場 자리)일대에 몽리(蒙利)하는 토지에 대한 세금을 국가가 받는 대신 달성 서씨들이 받게 하고 남산역토(南山驛土: 전 남산병원 일대) 즉 남산의 옛 역참(驛站)터를 달성 서씨들의 주거지로 하사하고 자손들 대대로 높은 관직과 녹을 주겠다는 등 3가지를 제시했다.
그러나 달성서씨 종손이던 구계(龜溪) 서침(徐 )은 '나라에서 필요한 땅인데 대가를 받을 수 없다'고 조건 없이 내어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世宗)은 기특하게 생각하고 '아무리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땅이지만 그대로 받을 수는 없다'면서 다시 서침(徐침)에게 소원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에 마지못한 서침은 대구지방 일대에 주는 환곡(還穀 : 흉년 또는 춘궁기에 빈민들에게 곡식을 싼 이자로 빌려주었다가 추수때 거두어들이던 제도)에 대해 이자를 면해 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전국적으로 이자를 받던 환곡을 대구지방만 빼놓을 수는 없다면서 당시 쌀 1섬에 1말 5되씩 받던 이자를 5되를 감해 대구지방에 한해서 1섬에 1말씩의 이자만 받아들였다. 이러한 서침(徐 )의 은덕에 힘입은 대구지방 주민들이 현종(顯宗) 6년(1665) 당시 유림들의 주동으로 연귀산(蓮龜山) 신록 즉 현 제일여중(第一女中) 자리에 구암서원(龜岩書院)을 세우고 매년 서침(徐 )을 향사(享祀)했다. 그후 구암서원(龜岩書院)은 숙종(肅宗) 43년(1717) 중구 동산동 신명여고 밑으로 옮기고, 최근에 다시 산격동 도청뒤 연암공원내로 옮겼다 이에 대한 기록은 구암서원묘정비(龜岩書院廟庭碑)에 갖추어 실려있다. 따라서 달성은 조선 세종 이후 다시 국유로 되었다.
경상도 감영이 대구로 이전되면서 최초로 이곳에 설치되었다. 원래 조선초기 경상도는 낙동강을 경계로 좌·우도로 분할되어 있었다. 정덕(正德 : 명나라 무종의 연호) 기묘년(1519)에 경상좌우도(慶尙左右道)로 감사를 나누었으나 폐단이 많기 때문에 다시 하나로 통합하였다. 만력(萬曆 : 명나라 신종의 연호) 계미년(1583)에 다시 좌우도의 감사를 두면서 솔권(率眷 : 감사로 부임하면서 가족을 데리고 오게 하는 제도)하게 하였다. 좌영(左營)은 상주(尙州)에 설치했으나 얼마 있지 않아 옶앴다. 갑오년에 감사 홍리상(洪履祥)이 교지(敎旨)를 받들어 성주(星州) 팔거현(八 縣)에 감영을 열었으니, 명나라 장수 유총병(劉摠兵)이 주둔한 곳이다. 을미년에 지역이 커서 다스리기가 어렵다 하여 다시 좌우도의 감사를 두었다. 임진왜란 와중이던 선조 29년 병신년에 감사 이용순(李用淳)이 다시 좌우도를 겸하여 다스렸다.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과 상의하고 장계(狀啓)를 올려 달성에 감영을 개설하였고, 인하여 석축(石築)을 더하였다. 정유년의 병란에 다시 유영(留營)을 없앴다. 기해년에 감사 한준겸(韓浚謙)과 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이 장계(狀啓)를 올리면서 '성주와 대구는 경상도의 중앙인데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고 또한 풀숲으로 여전히 막혀 있다.'고 아뢰어 잠시 안동부에 유영(留營)을 두었고, 같은 해에 양계(兩界)의 관례에 의하여 2년마다 교체하게 하였다. 신축년에 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이 장계를 올림에 본부(本府)의 유영(留營)이 대구부사를 겸임하게 되면서 판관을 따로 두었고, 경산, 하양, 화원 등의 현(縣)이 대구부에 할속(割屬)되었다.
경상도 감영을 대구로 옮길 때에 하필이면 대구읍성을 두고 달성에다 설치하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선조 25년부터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에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즉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끄는 왜군 1번대 18,725명은 선조 25년 4월 14일 부산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상해 들어와 일주일 만인 4월 21일 대구읍성(大丘邑城)이 함락당하고 말았다. 당시 대구읍성은 평지인데다가 견고하지 못하였으므로 항거 불능이었다. 부사(府使) 윤현(尹睍)은 한번 맞부딪쳐 싸워 보지도 못하고 군민(軍民)을 거두어 공산성(公山城)으로 퇴진하였으므로 대구는 왜군 후속부대의 통과로(通過路)로써, 또 후방 경비부대의 주둔지 역할까지 하였으므로 관아(官衙)고 뭐고 남아 있을 것이 없었다. 따라서 선조 29년 경상도 좌.우도가 통합되면서 감영이 대구로 옮겨지자 자연 피해가 적은 달성(達城)에다가 감영을 설치하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정유재란(丁酉再亂)때 다시 대구로 쳐들어온 왜군이 달성감영(達城監營)을 완전히 불태워 버렸으므로 그 이후는 줄곧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폐허가 된 채 버려졌던 달성이 또다시 일본인들에 의해 수난을 받기 시작한 것은 1894년 6월 발발한 청일전쟁(淸日戰爭)때 부터다. 동학란(東學亂)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출병한 일본군(日本軍)이 달성(達城)을 진지(陣地)로 사용한 것이다. 그 뿐아니라 1906년 11월 3일 당시 일본 명치천황(明治天皇)의 생일을 맞아 대구에 거주하던 일본인 1,500명이 소위 황대신궁 요배전(皇大神宮 遙拜殿)을 달성(達城)에 건립하였다. 달성에 세워진 일본인 신사(神社)건립에 대해 일본인들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현재 요배소(遙拜所)의 창립은 명치37년(1904) 9월 거류민 유지 회합의 석상에서 부내(府內) 달성산(達城山)에 황조 요배전(皇祖遙拜殿)건립에 관한 것을 논의 한데서 시작되며 이듬해 봄 거류민 유지는 당국과 의논해서 이산을 일.한인 공동의 공원지로 만들고 달성 내의 승지(勝地)를 택해서 황조 요배전(皇祖遙拜殿) 용지의 표목을 세웠다<중략>. 요배전(遙拜殿)의 건물은 이와 같이 준공했으나 이산에 통하는 도로가 없고 겨우 논길을 따라 참배할 수 있는 상태이고 또 건축 및 제전(祭典)을 위해서 많은 부채가 생겼으므로 여기에 달성공원(達城公園) 기성회를 조직, 기부금 7천여 원(圓)을 얻어 부채를 갚은 뒤 공원도로를 수축하고 아울러 공원의 정리를 했다. 이후 대구 신사유지 경영규약(大邱神社維持經營規約)을 만들어 신전사무소(神殿事務所) 부속건물, 비품 등을 부(府)에서 무료로 대여 받고 1914년부터 20년간 달성공원 46,485평 가운데 1,536평을 신사경내지(神社境內地)로서 역시 무료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사(神社)가 건립되면서 대구 주민들은 또 다른 고초를 겪어야 했다. 당시 한국인에 대한 신사참배(神社參拜)와 동방요배(東方遙拜)는 나이어린 국민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까지 내려져 매월 2회꼴로 20 ∼ 30리길을 걸어가서 참배를 해야 했고 발가락이 부르트면 상급생 등에 업혀서라도 달성공원을 왕복하며 허리를 굽혀야 했다. 따라서 당시 달성은 시민들에게 공원으로 아낌을 받기 보다 [망국의 한]을 되씹게 만드는 [치욕의 공원]이었다.
물론 해방 이후 신사(神社)는 바로 철거되었고 배전(拜殿)역시 공원으로 조성되면서 철거되었다. 따라서 달성은 선사시대 이래 대구 시민과 고락(苦樂)을 같이해 온 대구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 대구시내의 대표적인 공원으로 달성(達城)이 현재처럼 단장된 것은 1965년 정부에서 관리권을 인수받은 대구시가 이듬해 1966년 8월 쓰레기 더미로 가득 찼던 일대를 단장하고 부터다. 공원으로 조성되면서 동쪽 입구 일부분을 파손한 것외에는 성벽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달성(達城)은 성을 쌓은 이래로 계속 사람이 살아왔고, 다행히 대규모로 파괴되지 않아 달성(達城)의 지하에는 선사시대 이후 각종 유물과 기록에 전해지는 우물과 못이 파묻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관아(官衙)와 사람이 살던 달성(達城)에 동물원이 들어 서 있어 사적지로서의 복원이 시급하다. 또한 달성(達城)의 명칭은 달성(達城) 그 자체이지 달성공원(達城公園)이 될 수는 없다. 이름은 달성(達城)으로 하고 용도를 사적공원(史蹟公園)으로 해야할 것이다.
대구시에서는 2000년 4월 2일부터 달성(達城)의 공원입장료를 폐지하고 누구나 드나들 수 있도록 공원을 개방했다. 선조들의 체취가 살아있는 달성을 시민들이 가까이 할 수 있도록 된 것은 다행한 일이나, 아직도 선조들이 살던 곳에 동물을 살게한다는 것이 문화시민으로서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