達城公園(달성공원) 換地(환지)의 由來(유래)
현재 達城公園(달성공원)인 達城(달성)터가 新羅(신라) 景德王(경덕왕)때 안개 자욱하고 천지가 진동하며 솟아났다는 傳設(전설)이 있으나 이는 達城址(달성지)를 신비롭게 하기 위한 말일 것이다. 達城址(달성지)의 주위가 944尺(척)인데 築壇(축단)한 것 같이 자연적으로 담장이 되어있다. 世人(세인)은 이것을 天作(천작)이라 한다. 大邱(대구)는 본래 신라(新羅)의 達句火縣(달구화현)이었고 경덕왕이 大丘(대구)로 고쳤는데 수창군(壽昌郡)의 영현(領縣) 이었다. 고려 현종 때에 경산부(京山府)의 속현(屬縣)이 되었고 인종 때에 현령을 두었으며 조선 세종조에 郡(군)으로 승격되었다. 英祖朝(영조조)에 丘(구)는 孔子(공자)의 諱字(휘자)라 하여 丘(구)를 邱(구)로 개칭하자는 李亮采(이양채)의 상소가 있었다. 鮮初(선초)에 都護府(도호부)를 설치했고 憲宗朝(현종조)에 이를 폐하고 公廳(공청)이 되었다가 서기1915년 達城公園(달성공원)으로 공개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공원내에 三井三池(삼정삼지)가 있었다고 전해오나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世宗朝(세종조)에 某地師(모지사)가 達城徐氏(달성서씨)의 세거지(世居地)인 達城(달성)이 천하의 聖地(성지)요 왕이 나올 大地(대지)오니 그 지역에 城(도호부)을 두는 것이 좋겠다는 간언을 세종에게 상신하였다. 세종은 이 말에 따라 서씨 소유인 達城址(달성지)를 兵馬都監(병마도감)을 시켜서 조사한바 天塹可城(천참가성)이요, 그 자손들중 麗朝(려조)에 셋 君(군)이 나고 인물들이 비범하여, 王侯將相(왕후장상이) 끊이지 않겠다고 세종에게 그 사실을 아뢰니 세종께서 版圖公(판도공)의 4세손 龜溪公(구계공) 諱(휘) 沈(침)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경의 터를 나라에 헌납하라, 그 곳에 城(성)을 쌓고 都護府(도호부)를 설치 하겠노라 하시옵기에 龜溪公(구계공)께서 왕명에 순응하겠나이다고 하시와 세종은 크게 기뻐하시고 그 代土(대토)로 南山古驛(남산고역) 일대와 현 남산동4번지 터와 蓮新池와 新池 二池(이지)의 所貢雜物(소공잡물)을 주겠노라 하시고, 왕께서 다시 卿(경)과 그 자손들에게 대대로 祿(록)을 주시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公(공)은 천하의 토지가 모두 왕의 것이거늘 국가시책에 따라 땅을 바친다고 어찌 臣(신) 혼자만이 부귀를 받겠나이까 황공무지오나 원컨데 達城郡民(달성군민)에게 고루고루 耗穀(모곡)을 감하여 주옵소서 하시니 이 말을 들은 왕께서는 또 한 번 크게 기뻐하시며 착하다 자기의 부귀를 바라지 않고 백성의 償還穀(상환곡)을 감하여 달라하니 애국애족하는 거룩한 마음씨라 칭찬하시고 償還穀(상환곡)의 삼분의 일을 감하여 준다는 鐵券(철권)을 大丘都護府(대구도호부)에 하사하였다. 1834년 徐憙淳(서희순) 觀察使(관찰사)가 다시 백분의 오를 감하게 하였으니 다른 고을보다 삼분의 이를 減(감)해 졌다. 그 후 達城郡民(달성군민)들은 조선말엽까지 그 惠澤(혜택)을 입게 되었다. 이곳이 또한 우리 서씨터란 표적이 일제초까지 그 곳에 보전되어 있었다 한다. 이상 사실은 大邱府誌(대구부지)에 기록되어 있다. 1971년 달성서씨대종회에서 달성에 달성서씨유허비(達城徐氏遺墟碑) 건립하여 그 내력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