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 고려 문하찬성사 세자사부 정평공 학암선생 휘 균형 사적>
公의 諱(휘)는 鈞衡(균형)이요. 자는 商卿(상경)이며, 號(호)를 鶴岩(학암)이라 하고 達城人이라. 高麗(고려) 忠惠王(충혜왕) 復位(복위) 元年(원년) 1340년에 나서 恭愍王(공민왕) 九年에 司馬試(사마시)에 뽑히었고 연달아 文科(문과)에 이기어 三等九人에 들었으니 때에 나이 방년 二十一이라. 圃隱(포은) 鄭夢周(정몽주), 月亭(월정) 임복, 三憂堂(삼우당) 文益漸(문익점), 石灘(석탄) 李存五(이존오)가 모두 同榜及第(동방급제)라. 蘭溪(난계) 金得培(김득배)가 詩官(시관) 이었고, 때에 사람들이 뽑히었음을 칭송하다. 公이 蘭溪門下에 드나 들면서 圃隱,石灘,月亭,三憂堂,陶隱(도은) 李崇仁,楊若齊(양약제) 金九容(김구용),圓齊(원제)鄭樞(정구).諸賢(제현)으로 더불어 다 同門友(동문우)가 되여 나아가면 經綸(경륜)에 빛을 나타내고 물러나면 도의를 연마 했으며 直節(직절)로 명성이 자자하여 朝野(조야)에 儀表(의표)가 되었다.
恭愍王(공민왕) 15년(1366)에 司諫院(사간원)의 左司諫(좌사간)에 오르니 때에 신돈이 국권을 오로지 마음대로 恣行(자행)하며 왕과 더불어 나란히 앉았는지라 公이 左司儀(좌사의) 정구와 正言(정언) 이존오와 더불어 글을 올려 죽이자고 간청한 것으로 십여년을 축출 되었다. 禑王(우왕)五年(1379)에 비로소 복직되어 右代言(우대언)으로 成均試(성균시)에 계실 때 우왕이 시무의 題(제)를 보고져 하거늘 公이 말하기를 과장에서 試驗問題(시험문제)를 밖으로 새우지 않는 것인데 하며 왕에게 보이지 않았다.
우왕 12년에 直提學(직제학)으로 吏部尙書(이부상서)를 배수하였다. 1389년에 大臣의 議(의)에 쫓아 꾀하여 恭讓王(공양왕)을 세우고 左命功臣(좌명공신)에 勳功(훈공)을 錄(록) 하였으며, 다시 政堂文學(정당문학)을 배수하였다. 이듬해에 商議(상의) 門下贊成事(문하찬성사)에 世子師傅(세자사부)를 배수 하였고 조금 있다가 楊廣道都觀察使(양광도도관찰사)를 배수 하였으며, 이듬해 五月甲午일에 官(관)에서 돌아 가시니 享年(향년) 五十二세라.
아! 公의 풍채가 영특하고 뛰어 났으며, 氣節(기절)이 忠直(충직)하여 二十一에 연거퍼 大小科(대소과)에 합격 하였다. 文學(문학)과 德望(덕망)이 당세에 推重(추중) 되었으나 다만 恨(한) 되는 것은 때에 麗朝(려조)가 망하는 즈음에, 공이 있고서 왕씨가 保存(보존) 되었고, 公이 돌아 가시자 王氏도 망하였다. 公이 장수를 하지 못한 것은 또한 氣數(기수)가 그리하였던가? 또 지금 鵠嶺(곡령) 송림속에 墳墓(분묘)를 찾을 길이 없거늘 하물며 履歷(이력)과 行言(행언)의 자세한 것이며 학문의 얕고 깊은 것을 어찌 알겠는가.
訃音(부음)을 듣고 恭讓王(공양왕)이 크게 애도하여, 예관을 보내어 조제하고 諡號(시호)를 貞平(정평)이라 내리었다.
부인은 貞敬夫人(정경부인)으로 光山郡夫人(광산군부인)金氏이니 典儀副令(전의부령) 英利(영리)의 따님이라. 三男을 낳으니 長에 沈(침)은 制處使(제처사)로 號(호)를 龜溪(귀계)라 하며, 次에 습은 文科(문과)에 松禾府使(송화부사)이며, 季에 渙(환)은 郎將(낭장)이였다.
※ (高麗史) 恭讓王(공양왕) 三年(1391) 辛未(신미) 五月 甲午(갑오)일에 전 楊廣道觀察使(양광도관찰사) 徐鈞衡(서균형)이 별세하여 부고가 들리니 임금이 애도하여, 관을보내어 예제하고 시호를 정평이라 주었으니 익법에 이르되 正直(정직)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을 貞(정)이라 하며 淸廉(청렴)하여, 스스로 이기는 것을 平(평)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