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大丘와 달성達城 서씨의 연원淵源은
두 서씨의 옛 문헌에 의하면
조선시대 이전부터 대구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달성(현 달성공원)에서 발원한 같은 조상의 후손인데 계파가 갈라졌습니다.
문헌을 살펴보면
고려시대에는 두 계파가 본관을 거의 대구로 사용하였고
조선시대부터 두 계파의 구성원들이 본관을 대구 또는 달성을 혼용해서 사용하였는데
본관을 혼용하여 쓰게 된 이유는 지명의 변천(달구達句-대구大丘-달성達城-대구大邱)에 따른 것으로 사료됩니다.
근래부터는 두 계파가 족보 제호에서 본관을 대구와 달성으로 각각 따로 쓰고 있습니다.
대구서씨는 원조遠祖를 휘 한閈으로 계보하였고
달성서씨는 원조遠祖를 휘 진晉으로 계보하였습니다.
두 서씨가 같은 조상의 후손인데
원조를 달리 한 것은 오랜 세월 동안 문헌의 민멸로 인하여
현재 나타난 문헌으로는 閈과 晉의 계대系代를 정확히 고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같은 조상의 후손들이므로
대구서씨에서는 달성서씨를 지칭할 때 원조의 관직을 따라서 판도공파라 하기도 하고 또는 향파鄕派라 하기도 하며
달성서씨에서는 대구서씨를 지칭할 때 원조의 관직을 따라서 소윤공파라 하기도 하고 또는 경파京派라 하기도 합니다.
판도공파를 향파라고 칭하는 것은 晉의 후손들이 주로 고향인 대구에서 번성하였기 때문이고
소윤공파를 경파라고 칭하는 것은 閈의 후손들이 주로 서울인 경성에서 번성하였기 때문이며 그 대표적인 예로는 시충숙공諡忠肅公(휘서성諱徐渻/호약봉號藥峯)의 후손 중에 기라성 같은 인물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세간에서는 서지약봉이요 홍지모당(徐之藥峯洪之慕堂)이라는 말도 생겼는데 이 말은 "서씨 중에는 약봉의 자손들이 잘 되었고 홍씨 중에는 모당 홍이상(慕堂洪履祥)의 자손들이 잘 되었다" 는 뜻입니다.
계파는 달성서씨인데도 호적에는 대구서씨로 등재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전기한바와 같이 두 서씨의 구성원들이 과거에 본관을 혼용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그렇지만 두 서씨는 같은 조상의 후손입니다.